모처럼 가는 대전예술의전당후원회 문화기행이지만, 아직은 시원치 않은 건강에 편도 세 시간 버스여행이 유럽 코치투어(Coach Tour)처럼 미덥지가 않아서,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통영은 노산이 몽매에도 가고파하던 예향 ‘내 고향 남쪽바다’ 아닌가? 막상 특급 버스를 타보니까 허리에 부담이 거의 없어서, 과연 대한민국의 자동차산업이 세계 첨단급임을 실감하였다. 물론 1970년대 초 해군 시절이나 공연관람 등 몇 차례 익숙해진 곳이다. 기행의 주제는 2025 통영국제음악제의 피날레,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의 ‘브리튼 전쟁 레퀴엠(Britten; War Requiem) 연주’였다.
오가는 길에 들른 맛집 기행과 남강 상류 함양의 거연정·동호정 등을 지나는 ‘Drive-Thru Tour’는 덤이었다. 시내에 들어서기 2Km 쯤 전방부터 부처님 오신 날 연등처럼 오색풍선이 연도에서 반기고 있어, 통영시청이 이번 행사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은 아담한 언덕에 자리 잡아, 계단을 올라서자마자 항구 전망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이다. 육백 여석의 아늑한 아래층 오른편 좌석에 앉아, 3월 28일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으로 막을 올렸던, 열흘에 걸친 음악제의 대미(大尾) ‘전쟁레퀴엠’ 연주를 기다렸다.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특유의 초반 예열부족은 잠시, 현대음악답지 않게 친밀감 넘치는 리듬과 고풍스러운 멜로디가 흐른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가장 큰 고통을 겪은 영국, 독일, 소련 세 나라를 대표하는 보컬을 받쳐주기 위한 앙상블 팀을(첼로 오보에 바이올린 3 콘트라베스 퍼커션), 오른편 맨 앞에 배치한 특이한 구성이다.
가사는 당연히 라틴어지만, 바리톤과 테너는 영어 가사인 점도 색다르다. 적당히 떨어져 후방객석에 자리 잡은 합창단은 장중한 진혼미사의 분위기에 안성맞춤이요, 3층 우측 객석의 소년합창단 또한 미묘한 시차(時差)로 인하여, 마치 천상(天上)에서 내려오는 듯한 음향효과를 연출한다. 우리일행이 앉은 오른쪽 좌석에서는 소년합창단을 볼 수 없으니 천상효과는 더 더욱 컸다. 고저 변화가 무쌍한 어려운 음역을 정확하고 드라마틱하게 소화해낸 테너가 가장 돋보였고, 스킨헤드 콘트라베스의 익살스런 표정과, 영화 벤허에서 보았던 갤리선 전투장면의 노젓기 고수(敲手)처럼, 밀고 당기며 앙상블 팀을 리드하는 팀파니스트도 인상적이었다. 사실은 뜻이 맞는 지인들과 함께 만든 후원회가 어언 창립 21주년을 맞은 기념기행에, 초대회장으로 곡목도 가수도 모르고 공연 팸플릿조차 보지 못한 채 따라온 Blind Concert이었기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갑자기 공연리뷰를 부탁받고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5분 남짓을 감상 느낌만을 얘기한 내용에 미련이 남아, 동행한 스물여섯 분의 회원을 위하여, 이 곡이 전쟁보다는 반전(反戰)의 외침임을 한 번 더 강조하려고 써본 글이다.
이 곡은 2010년엔가 대전예술의전당에서 함신익 지휘자가 6·25 기념으로 공연한 바 있어 낯설지는 않다. 브리튼(Benjamin Britten; 1907-1976)은 치과의사 부친과 아마추어 가수 모친 사이에 태어난 엘가와 더불어 영국이 자랑하는 작곡가다. 1940년 나치공군(Luftwaffe)의 공습으로 파괴된 500년 역사의 성 미카엘 성당을 재건하며 헌당식에서 연주할 곡을 의뢰받아, 1962년 작곡자가 직접 초연을 지휘했고, 로스트로포비치와 쇼스타코비치도 인정한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작품의 하나다. 평화주의자 브리튼은 이차대전에 목숨을 잃은 네 친구를 추모하면서 곡을 쓰기 시작했으나, 모든 전쟁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인류애와 평화를 기원하는 뜻을 담아 초연에는 지휘자 네 명이 동참한 한 시간 반의 대작을 완성한다. 레퀴엠은 대제창(大祭唱)의 시작인 ‘안식(Requiem Aeternam)’에서 유래, 진혼곡 또는 만가의 뜻으로 쓰인다.
두 가지 언어로 된 것은, 전례문(典禮文)은 라틴어이고,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은 Wilfred Owen의 시는 영어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전쟁레퀴엠이 부르짖는 반전·평화(反戰·平和) 메시지가, 밥 딜란의 ‘Blowing in the Wind’나 존 레넌의 ‘Imagine’의 탄생, 나아가 범세계적인 평화운동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믿는다.
후원회장 당시 문화기행 중에서, 덕수궁의 한국 근현대회화 100인 선(選)과 리움에서 본 거대한 거미조각 마망, 그리고 뮤지컬 전용극장인 블루원 개관기념 삼총사공연이 기억에 남는다. 그밖에도 대학가 연극관람 등 대부분 ‘서울’로 올라왔다.
이번 기행에서 감탄한 것은 12만 인구의 지방도시 통영이 국제음악제를 10년이 넘게 이어오는 저력이다. 통영은 각종 문화행사는 물론 인구감소와 지방소멸극복 캠페인 등 대한민국의 갈 길을 찾아가는 지자체들의 롤모델이요, 작은 거인이다.
이제 ‘수도권’ 애호가들이 ‘지방’ 이벤트와 문화행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도와야 한다. 도로가 기막히게 좋아져 1박2일 코스만 잡는다면, 전국 어디든 맛집 기행과 절경 감상에 더하여 문화향유까지, 일석삼조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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