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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전 치협 대의원총회 의장>
나가수 1: 고전음악
명문음대 성악과를 나와 이태리로 유학 간 청년이 베니스에서 곤돌라를 탔는데, 사공이 부르는 나폴리 민요를 듣고는 다음날 귀국해버렸다. 한국에서 그토록 촉망을 받고 자신만만했던 스스로가 너무나 부끄러웠던 것이다. 고교시절에 음악선생님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들려준 얘기로, 이제는 한국의 새별들이 국제 콩쿠르를 싹쓸이 할 정도로 성장했으니, 과연 격세지감을 느낀다. 한 가지 교훈은 미술이 그러하듯 성악은 타고난 재능이 거의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트럭기사요 페리 코모가 이발사였다는 사실은 “대중가요니까” 해서 넘어간다 치고, 20세기 최고의 테너라는 파바로티도 사실은 길거리 스카웃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인지(체계적인 교육 부족), 파바로티의 발성은 뱃속에서 끌어올리는 소리가 아니라 두성에 가깝다는 말도 있었다.
중학시절 단체 입장한‘멜바의 연가’는 음악 영화였다. 늙은 스승은,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엎드려서, 심지어 선 자세에서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발목을 잡고 발성 연습을 시킨다. 원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사정없이 회초리가 날아온다.
마지막 장면에서 부르는 멘델스존의‘노래의 날개’는 감동이었다. 최고의 경지에 오르려면 혹독한 훈련과정이 필수라는 사실에 토를 달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서울음대 김인혜 교수의 CD를 즐겨 듣는다. 김 교수는 비록 오락예능프로라고는 하지만, 야식배달 청년 김승일을 발굴해 목청킹으로 키우는 과정에 태풍을 만나, 교수라는 천직까지 잃었다. 애매한 공사(公私)구분과 비리와 체벌로 얼룩진 진정서를 근거로 해임이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단초는 지나치게 정열적인 김 교수의‘오버’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었나 싶다. “고음에서 이처럼 고운 미성은 처음 듣는다”는 식의 멘트는, 대학제자들을 포함해 모든 성악도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다른 교수들은 품위까지 상처받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만약 김승일씨가 현역 명문음대생이었다면 그가 부른‘네순 도르마’가 A학점을 받았을까?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젊은 여인이 합죽선을 활짝 펼쳐든다. 입을 열어 장내의 정적을 깨뜨리는 순간, 문자 그대로, 깬다. 걸쭉하게 목이 쉬어 장내에 울려 퍼지는 쇳소리는, 갈데없이 선운사 동구 앞 막걸리 집 여자의 가락이다. 그래서 젊어서는 창(唱)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예인(藝人)에 대한 조선조의 홀대(忽待)와 일제 강점기에 힘겨운 전승과정을 겨우 숨만 붙어 살아남은‘노인 창법(唱法)’이 창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또 나이가 들어 잠자던 한민족의 DNA가 깨어나면서, 해장으로 떠먹는 따끈한 된장국물처럼 속을 풀어주는 창의 부드러움에 몸을 맡기게 되었다. 이제는 안다. 우리 고유의 것은 소중한 것이고, 한때 많은 사람들이 앞서간다고 착각했던 북한식 개량 국악은 창법도 전문가도 국적도 없는 경박한 날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예로부터 명창은 득음(得音)을 위하여 폭포 옆에서 몇 년씩 발성 연습을 했다고 한다. 쏟아지는 폭포소리를 목청이 뚫고 나갈 때까지 몇 번씩 피를 토하다 보면, 성대에 흉터가 남아 가창력에다가 호소력 짙은 허스키까지 얻는다. 엄한 스승의 혹독한 조련 또한 필수다. 이름 자체에‘오랜 세월’의 의미를 갖는 고전음악은, 양의 동서를 떠나 정상에 이르면 서로 만나는 것이다. 깊이 있는 고전음악 감상을 위하여 브로슈어를 읽어보는 정도의 예습은, 아티스트의 노력에 대한 예의인 동시에, 듣는 이에게도 남는 장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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