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7일 오후 5시. 하노이에서 탑승한 쌍발식 프로펠러 비행기는 김종철 전 학장님을 포함한 우리 일행 5명을 무사히 라오스 비엔티안 왓타이 국제공항에 데려다주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습하고 더운 공기, 그리고 어딘지 모를 서투름. 지금은 없어졌지만 20불을 내고 도착 비자를 받은 뒤 시내 여행자 거리 숙소에 도착하며 바라 본 바깥 풍경은 말로만 듣던 저개발 국가의 그것이었다. 일부 주요 도로마저 포장이 안 되어 먼지가 날리고 있었으며, 소수 호텔을 빼고는 대부분 2~3층의 낮고 낡은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위생 관념도 희박하였으며 2박 3일의 기간 동안 기억에 남는 것은 전통 식당에서 먹었던 땅강아지 튀김과 흰개미 알 샐러드 정도?
라오스 첫 방문은 이렇게 끝이 났고 개인적으로 2006년 이후 교류를 지속적으로 하던 베트남 하이퐁 대학은 매년 찾았지만, 라오스를 다시 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그러던 2012년 우리 대학의 백대일 교수님(라오스 치의학 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세우신)께서 기회를 주셔서 한세현 교수님, 류인철 교수님과 함께 4년 만에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다시 찾은 라오스는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개인적으로 개발도상국 발전의 특징적 지표 중 하나는 그 나라 교수님들의 옷매무새라 생각한다. 일단 옷이 깨끗해지고 천이 화학섬유에서 천연섬유로 바뀐다. 더불어 면도와 이발도 깔끔히 하고.
이 때 지금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도 비엔티안을 벗어나 혼자 루앙프라방을 3박 4일간 여행하게 되었다. 현지에서 당일 패키지 관광도 하고 새벽에 탁발(탁밧) 행사도 참여하였으며 자전거로 시내를 돌며 하루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아직까지도 가장 좋은 여행 경험으로 남아 있는 ‘어떤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다. 패키지 관광 도중 유일한 아시안이었던 나는 식사로 제공되는 샌드위치가 입에 맞지 않아 식사 장소였던 가이드의 집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가이드의 식구들은 점심 중이었고 얼쩡거리던 나를 발견한 가이드의 아버지께서는 갑자기 자리로 끌고 와 밥을 퍼주셨다. 물론 말도 통하지 않았지만 바닥에 앉아 손으로 집어 먹었던 찹쌀밥과 수초 튀김, 매콤한 고수 시래깃국과 달걀프라이의 맛은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우리가 살다 보면 계기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 계기는, 때로는 너무나 개인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심지어 충동적이기까지 하다. 할아버지의 점심은 이후 2년 반 동안 10번을 방문하고 2번의 라오스 지원 과제를 수행하게 되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 물론 국제 사회에의 기여, 라오스 국민 구강보건 향상과 같은 당위성 실현과 부학장과 국제교류실장의 업무 수행, 이종욱-서울 프로젝트 참여와 같은 외부적 계기들도 많았지만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한 가장 큰 내부적 계기는 바로 루앙프라방 할아버지의 점심 한 끼가 주었던,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인간에 대한 작은 감동이었다고 생각된다.
다음 해 라오스 방문의 기회가 다시 생겼을 때 어쩌면 외면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계기에 이끌려 참여를 결정하였고 우연히 다양한 경로의 방문이 연달아 이어졌다. 그리고 2014년 8월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글로벌교육지원사업에 응모하여 치과 분야 처음으로 수요조사 사업이 선정되었다. 솔직히 지원서 작성을 결정한 후 첫 느낌은 그야말로 막막함이었다. 체계적으로 지원 사업을 해본 경험도 없었을 뿐더러 예산이 확정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라오스 대학 측의 도움도 크게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함께 경쟁해야 하는 다른 팀들은 이미 수차례 경험이 있어 체계가 잡혀 있다 전해 들었기에 계획서를 작성하며 ‘내가 왜 이것을 쓰고 있는가’에 대한 자문을 수도 없이 하였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언제나 나 자신에 있었으며, 다행히 1달여의 준비 결과로 사업 선정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리고 1년간 6번의 방문과 라오스 교수 초청 연수 등의 과제 내용을 수행하였고 다시 올해 7월에 진행되었던 동일 사업에서 나름 치열한 경쟁을 뚫고 글로벌교육지원사업 본 사업 분야에 선정되어 내년 7월까지 본격적인 지원 사업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행하였던 내용들, 그리고 느꼈던 여러 가지에 대해서 다음 번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고자 한다.
라오스의 정식 국명은 LAO P.D.R (PEOPLE’S DEMOCRATIC REPUBLIC)이다. 흔히 P.D.R을 빗대어 Please don’t rush 라고 표현하여 느긋하고, 여유 있으며 어찌 보면 게을러 보일 수도 있는 라오스 사람들의 성품을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특징은 개인적 관계에서는 착하고 정이 많으며 욕심 없는 좋은 사람이라고 칭할 수 있지만 일을 함께하는 공적 관계에서 보면 때로는 난감한 상황에 놓일 때가 많다. 지난 1년간 사업을 진행하며 라오스에서 느끼고 깨달은 몇 가지를 소개하고 싶다.
첫 번째, 느림에 대해 절대 화를 내지 말자. 나만 손해이다. 사업을 하며 라오스 지원 과정에서 보이는, 때로는 심하게까지 느껴지기도 하는 느긋함을 우리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라오스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한국 사람들의 ‘아등바등’이 오히려 안타깝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도움을 받는 다고해서 적극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급한 일인 경우 계속 재촉하고 이메일과 전화 연락을 하고 때로는 직접 방문해야 일이 진행되지만 그렇다고 만나서 큰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만약 상대방이 큰 소리를 낸다면 그 자리에서야 가만히 있겠지만 이후 사업 진행에 대한 협조는 매우 어려워진다. 다행히 최근 나와 함께 하는 젊은 교수들은 한국 연수의 경험과 학교 발전을 위한 진심이 있어 일의 진행이 한결 쉽고 빨라졌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더욱 가속화될 것 같다. 하지만 효율성이 절대적 가치 기준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두 번째, 고마워하는 모습을 기대하지 말자. 물론 라오스 사람들이 몰염치하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지원을 받는다고 해서 아주 대단히 고마워하거나 칙사 대접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면 안 된다. 오히려 지원과 상관없이 좋은 인간관계가 만들어졌을 때 더 잘해주는 경우가 많다. 최근 자본주의화로 물신 숭배가 깊어졌지만 기본적으로 라오스는 불교 국가이고 나눔의 국가이다. 탁발이 대표적인 예로 좀 더 가진 자가 부족한 자와 나누는 것이 섭리라고 생각하곤 한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일정 정도의 나눔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외국으로부터의 다양한 지원에 익숙해져 버린 측면도 무시할 수는 없다. 오늘 못 받으면 내일 또 다른 나라에서 받으면 되기에 외국의 지원에 그렇게 감격하지는 않는다.
세 번째, 불편함을 즐기자. ‘카르페디엠’식의 관념적 선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문제에 대한 올바른 자세가 필요하다. 우선 저개발과 문화 차이를 동일 시 하는 오류를 피해야 한다. 한국에 비해 라오스는 사회 전반 편의시설 발전이 안 되어 있어 불편한 점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저 개발된 것은 아니다. 필요가 없어 사용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한 예로 손으로 집어 먹는 찹쌀밥을 들 수 있다. 요즘엔 일부 라오스 젊은이들이 숟가락으로 찹쌀밥을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아직 대부분은 손가락을 이용하고 나 역시 찹쌀밥을 먹을 때 손가락을 즐겨 쓴다. 이유는 단 하나이다. 끈적이는 밥을 먹기에는 숟가락보다 손가락이 훨씬 편해서이다. 이러한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서로에 대한 이해가 시작된다. 조금만 위생에 신경 쓴다면 손가락이 숟가락보다 비위생적일 이유가 없다. 주방장이 맨손으로 주물럭거린 생선회의 맛에 감탄하는 우리를 생각해보면 되지 않을까?
지난 1년간 라오스에서 수행하였던 주요 사업 내용은 대학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 지 구체화하고 구성원들이 이를 공유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내용과 치과의사의 역량 강화를 위한 임상전단계 실습실 개선 사업 타당성 조사이었다. 사업을 진행하며 지키고자 했던 사항은 1) 상호 이해 및 존중, 2) 가장 효율적이며 실현 가능한 사업내용 설정, 3) 지속 가능한 사업 내용 설정 그리고 4) 현지 인력들에게 동기 부여 등이었다. 물론 최종 목표는 라오스 국민 구강보건 향상과 대한민국의 국격 상승에 이바지하고자 함이었다.
본 사업은 2달 전 시작하여 아직 11개월이 남아 있고 9월 16일 7번째 방문을 앞두고 있다. 본 사업 진행 중 주요 내용인 실습실 지원 물품 선정 때문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라오스로부터의 이메일 회신을 기다리고 있지만 전에 비한다면 그다지 힘들지 않다. 오늘 연락 오지 않으면 내일은 올 테니까. 내일도 안 온다면 모레에는 분명 오겠지. 라오스 사람들이 즐겨 쓰는 두 단어 로 이글을 끝내고자 한다. 사바이디(안녕하세요!), 버펜양(천만에요, 문제없어요!)
이승표 서울대치의학대학원 구강해부학교실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