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와 회의, 회식의 연속으로 나의 퇴근 시간은 항상 밤 10시를 넘긴다. 일년 중 공유일과 휴일을 제외한 약 300일 중 250일 이상은 야근을 하고 공휴일과 휴가, 국경일을 포함한 약 65일 중 30일 이상은 주말 행사나 특근으로 일을 한다. 그러고 보면 정작 온전히 휴식할 수 있는 날은 일년 중 10분의 1도 되지 않는 35일 정도에 불과하다. 불쌍한 내 인생… 아니 더 불쌍한 나의 아내와 세 딸들…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지만 부실한 재테크 능력으로 모은 것 보다는 갚아야 할 빚이 더 많다. 매년 연말이면 자산 목록과 부채 목록을 비교하면서 이 빚들은 갚아도 갚아도 끝이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은퇴까지 남은 기간과 그 동안의 수익을 대략 비교해 보면 제정 부분에 있어서 내 인생은 그야말로 본전인 셈이다. 노년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저렇게 셈을 하다 보니 곧 이어질 부모님의 봉양과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아이들의 뒷바라지가 눈에 들어온다. 부부가 함께 맞벌이를 해도 부족하고 또 부족하다.
이제는 40대 중반이 되어 전에 없던 다양한 증상이 나타난다. 눈이 침침 해지고, 간과 장기 사이에는 지방이 자리잡는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하루 최소 6시간 이상이니 허리와 목에도 무리가 온다. 자연스럽게 운동은 멀어 진다. 그 뿐이랴, 무르팍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골반까지 통증이 있다. 기억력은 떨어지고 번득이는 아이디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이 한탄이 어디 나뿐이던가… 말을 다 할 수는 없지만 이시대 직장인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다. 죽도록 일만 하는 빚 많고 허리도 고장 난 개미 같은 이 일상이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
너무나 미안하게도 가족들과 충분한 시간을 함께하고 즐거움을 주지 못하지만 나의 아내와 딸들은 늘 나를 기다려 준다. 항상 반겨 준다. 초등학교 4학년인 큰 아이부터 7살 막내까지 나를 보면 두 팔 벌려 안아 주고 볼에 입을 맞춘다. 하루의 피로가 싹 씻긴다.
비록 갚아야 할 채무가 많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필요한 만큼 벌 수 있는 힘이 있고 좋은 직장이 있다. 월급쟁이가 욕심은 더 내봐야 뭘 하겠는가. 내가 버는 만큼 맞추어 살수만 있다면 그도 나에게는 족하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검소함의 유전자가 한 몫 한다.
노안이 오고 몸이 조금 아파도 나에게는 아직 20대에 뒤지지 않는 지구력과 참을성이 있다. 번득이는 아이디어는 없어도 그간의 경험과 노하우가 마치 지혜처럼 쏟아진다. 게다가 다행히도 나의 주변에는 똑똑하고 지혜로운 조력자들이 아주 많다.
그러고 보면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연들만 생각하면 나는 여지없이 불행하거나 특별히 행복할 일이 없는 사람 같다. 미래 지향적 사고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그러나 행복만큼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현재의 나와 주변에서 아무런 행복도 찾지 못하는 사람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는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행복’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현재’ 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나와 주변에 있는 행복을 찾아 볼 것을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나는 행복해 질 거야’가 아닌 ‘나는 지금 행복해’가 될 수 있도록….
늦은 저녁 퇴근길은 항상 라디오 방송이 함께 한다. 늘 듣는 목소리와 매일 비슷한 구성의 방송일지라도 나와는 아무 이해관계 없는 제 3자의 목소리에 대답할 필요도 없고 의도를 파악할 필요도 없이 그냥 듣기만 하면 된다는 것 자체가 편안함이고 위로다. 거기에다 고전부터 최신 곡까지 다양하게 들려주는 음악은 복잡한 머리와 무거운 다리를 이완시켜 주는 훌륭한 피로회복제이다. 그야말로 하루 중 가장 편안한 순간인 것이다.
불현듯 생각이 떠오른다. 지금의 나는 나의 일에 가진 열정을 다하여 일 하므로 행복한 것인가? 아니면 행복해 지기 위해서 이토록 일에 매진하는 것인가? 대답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일부러 휴식을 줄여 가며 일에만 매달리는 이런 가장을 둔 나의 가족들은 어떨까?
마관욱 가이스트리히 코리아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