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우리나라가 복지국가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10여년 전 출퇴근 시간 분당선 전철에서는 시각 장애인 (맹인, 장님, 봉사)이나 하지 장애인 (절름발이, 앉은뱅이)들이 찬송가가 들어있는 녹음기를 사용하거나 때로는 직접 찬송가를 부르면서 비좁은 통로에서 구걸하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왜 이들은 찬송가만 부르는가? 목탁은 치지 않는가? 아마 찬송가를 틀거나 부르는 것이 목탁을 두드리는 것보다 훨씬 벌이(?)가 좋아서 그런가? 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 전쟁을 겪은 저는 1·4후퇴 때 추운 겨울날 사방에서 포성이 가까이 울려오는데 피난민들은 엄청난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피난짐도 버리고 심지어 등에 업고 있던 아이까지 길가에 내던져 버리고 무작정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고 있던 기나긴 피난 행렬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군들은 후퇴 하면서도 자기들의 생명인 무기도 버린 채, 그들이 타고 있던 지프차에 길가에 내버려진 울고 있는 아이들을 가득 태우고, 일부는 걷지도 못하는 애들을 들고, 안고서 얼어붙은 눈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1952년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 미국인 스완슨 목사가 우연히 숙소 창문을 통하여 쓰레기 더미와 함께 트럭에 실려 나가는 동사한 어린이의 주검을 목격하면서, 미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을 호소하며 시작된 컴패션 (Com + Passion : 함께 고통에 동참한다는 뜻)은 1952년 한국전쟁 중에 거리를 떠돌던 한국 어린이들을 위해 시작되어 1993년 경제성장을 계기로 철수할 때까지 10만 명이 넘는 어린이들을 ‘1:1 양육’으로 도왔습니다.
지난 2015. 09. 04 일자 모든 신문에 터키의 남서부의 해양휴양지 보드룸 해변에서 빨간 티셔츠와 청색 반바지를 입고 모래에 얼굴을 파묻고 숨진 채 발견된 그리스로 가려던 시리아의 세 살배기 아일란 쿠르디 (Aylan Kurdi)의 사진이 공개된 후, 이 사진은 SNS를 타고 전 세계로 확산 되었습니다.
난민의 비극을 보여준 사진 한 장으로 지중해를 건너던 수십만의 시리아 난민들과 냉동 트럭 안에서 71명의 난민이 동사한 사건에도 꿈적 않던 유럽 민심이 변화되어 지금 곳곳에서 시리아 난민을 받겠다는 캠페인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계의 양심을 일깨운 세 살배기 난민의 주검…
·파도에 쓸려온 세 살배기 주검, 유럽을 울렸다…
·세 살배기 아이를 받아준 곳, 천국밖에 없었다.
·터키 휴양지에 떠내려 온 난민 꼬마의 주검… 마음 무너지는 이 비극에 세계가 운다…
·보고 있지? 네가 바꾼 세상을… 수많은 사람들을 살린 세살 꼬마의 희생… 등등은 신문에 보도된 기사 제목들입니다.
‘유럽의 벽을 허문 세 살배기 주검, 캐머린 (영국 총리) 난민 수천명 받겠다’라는 기사에서는 난민을 곤충떼로 비유하여 난민에 부정적 입장이었던 데이비드 캐머린 총리도, ‘세 살배기 죽음에 아버지의 입장에서 무척 가슴이 아프며, 난민을 위한 도덕적 의무를 다할 것이며, 난민 수천명을 받겠다’라고 언급한 내용을 보도하였습니다.
독일, 핀란드, 아일랜드, 프랑스, 아이슬란드 등 이들 유럽 국가들도 난민 수용 의사와 이들에 대한 지원 확대를 검토하겠다고 각각 발표하였습니다. 그런데 시리아는 한국 전쟁 당시 우리나라에 구호품을 보내 준 지원국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나 민간 구호단체에서는 이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겠다는 보도는 아직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치유에 관련된 말씀’은 도합 총 261회가 나옵니다. 이 말씀들은 예수께서 귀신 들린 자들의 고치심을 비롯한 질병 치유에 관한 구체적인 ‘치유 내용’과 이들 치유가 이루어지는 ‘치유의 장면’으로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치유의 장면은 마태복음에서 5회, 누가복음에서 3회로 총 8회에 걸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치유의 장면들에 대한 기록은 “불쌍히 여기사”와 “불쌍히 여기소서”의 두가지 경우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록된 말씀들은 “…예수님이여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마 15:22)를 비롯하여, 마 17:15, 20:30, 눅 17:13, 18:38, 18:39 등 6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신” 것에 관한 구절은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마 14:14) 와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마 20:33, 34) 마태복음 2곳의 장면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를 평소 많이 합니다. 지금 시리아의 많은 난민들의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외침은 허공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을 보는 순간 저들의 울부짖음- ‘불쌍히 여기소서’가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사’와 닿게 된다면 그리고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사’라는 마음이 전해질 수 있다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지금 세상에는 증오와 불신, 술수와 배신이 넘치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 형제와 자매, 친척 간에, 스승과 제자, 선후배와 동료, 동창이나 동기, 상사와 직원 등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지금 미워하고 있는 그 사람이 터키 휴양지에 떠내려와 해변에 웅크리고 숨져 있는 모습의 난민 꼬마로 보인다면, 아니 보여질 수 있다면, 그것은 ‘불쌍히 여기소서’ 가 아니라 ‘불쌍히 여기사’ 라는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엄청난 사건이 아닐까요?
김철위 S+H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