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생각하며…

2021.11.29 09:51:06

Relay Essay 제2476번째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어떤 끝이냐가 어려운 것이다.
이제 70 중반을 향한 나이가 되니 은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돌아보면 많은 고난과 역경을 지나왔고, 나름 보람을 느끼는 일도 많았다.


어머니 등에 업혀 전쟁을 겪었고, 모두가 어려운 형편의 시절을 근근히 넘어왔고, 선한 이웃과 동료, 스승의 도움으로 치과의사가 되어 이제 원로 소리를 듣는 처지가 되었다.

 

성경에는 ‘희년’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50년이 될 때마다 노예에게 자유를 주고, 빚을 탕감해주는 해방의 축제를 말한다. 이제 내가 치과의사 면허를 받고 의료인으로 삶을 영위한 지 50년이 다가온다. 그동안 노예로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주로 나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살아왔다고 생각이 든다. 내 학창 시절과는 다르게 내 자식들은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주려고 애썼고, 부모로서의 책임을 늘 무거운 등짐처럼 느끼며 살아왔다.

 

치과의사로 살아오면서 얼마간의 보람과 성취를 느끼며 지낸 것은 분에 넘치는 은혜라고 생각된다. 내 능력에 비해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된 것도, 탁월하지 못한 진료 능력에도 불만 없이 오랫동안 환자와 의사의 관계를 이어준 많은 환자분들께도 감사한 마음을 잊을 수 없다. 물론 가끔 진상 환자가 찾아와 내 미숙함을 드러나게 하고, 내가 교만에 우쭐대는 광대가 되지 않게 돌아보게 해준 것도 또 다른 감사 거리이다. 점차 서운함과 원망이 이해와 포용의 마음으로 바뀌어 가는 것도 늙어감의 보너스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을비가 내리는 늦은 밤, 떨어지는 낙엽의 소리에 잠이 쉬이 올 것 같지 않다. 이 낙엽들이 내게도 마무리를 해야만 하는 시간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듯하다.

 

눈이 어두워져 책을 읽기가 어렵고, 외치는 듯한 큰 소리에나 대꾸를 하게 되고, 작은 지팡이라도 의지해야 바깥나들이를 할 수 있는 그런 때가 내게도 오겠지….


동숭동 대학로에서 민주화 데모로 눈이 매웠던 기억, 많은 재시험을 겨우겨우 피해 가며 중,고생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로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던 학창 시절, 수련의 시절에는 어찌 그렇게 많은 일을 감당하고 지냈는지… 지금 돌아보면 모두 꿈만 같다. 모두 젊음이 가능케 한 열매들이다.

 

군의관 제대 후 80년에 시작된 개원의 생활이 벌써 40년이 지났다. 요즘도 가끔 오랜 세월 환자로 다니셔서 나와 중,장년을 같이 겪으신 어른들이 진료 후 가시면서, ‘나 죽을 때까지 병원 문 닫으면 안 돼요!’ 하고 소리치는 분들이 계시다. 그동안의 관계에 작은 들꽃 같은 결실이라고 생각되어 저절로 미소가 나온다.

 

종교적 신념으로 국내외 여러 곳에서 이런저런 의료봉사 활동을 해 온 지도 40년이 되었다. 한때 스스로 우쭐하는 마음에 연말이면 몇 군데를 다녀왔는지, 진료비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하고 헤아려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누가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니고,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을 누구에게 보이겠다고 세어보고 있는 자신의 못난 모습에 깜짝 놀라 반성한 적이 있었다.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이 남긴 교훈은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가 아니었던가? 최고가 되려는 마음보다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훨씬 훌륭하다는 것도 이때 배웠다. 60이 넘어서면서 “이 환자가 나보다 더 젊은 의사를 만나면 더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때가 오면 은퇴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퇴근길에 이런 되새김으로 하루를 돌아보는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

 

지금의 진료 환경은 전에 비해 너무나 많이 바뀌어 혼란스럽기도 하다. 의료 지식과 술식도 과거에 인정 받던 내용이 바뀐 것도 있고, 새로운 학설, 장비, 재료 등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도 많아졌다.


의사들이 양심적인 진료 행위를 통해 자연스럽게 환자의 신망을 얻어 존경 받던 시절은 저물고, 스스로를 과대 선전하여 환자를 불러 모으는 개업술이 도처에서 눈에 거슬린다.

부가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또 환자와 의사 간의 믿고 맡기는 신뢰의 진료 분위기는 점점 사라지고, 진료 전에 매 처치에 앞서 분쟁에 대비하는 서류를 작성해야만 하는 시대가 되었다.


계약관계의 완벽함이 슬픈 상인의 비참함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나 뿐일까? 의사란 오류를 범하지 않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단지, 환자보다 더 많이 공부했고, 치료의 경험이 쌓였고, 공감하고 위로하는 훈련이 되어 있는 윤리의식이 갖추어진 전문인일 뿐이다. 그런 분위기가 지금보다 조금 더 넓게 받아들여지던 시기에 내 의사 생활이 있었다는 것이 행운이요 축복인 듯하다.

앞으로 각박한 진료 환경에서 매일을 살아갈 후배 의사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고 싶다.

 

앞에 언급한 희년이 내게도 곧 닥치게 된다. 치과의사 면허를 1974년에 받고, 그간 의료 현장에 있었으니 내게도 이제 자유를 주고 스스로 등을 토닥여주며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다.


나와 내 가족을 위해 살아온 시대를 마감하고, 아직 눈과 귀가 웬만하고 건강이 조금 남아 있을 때, 국내외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마지막 열정을 보태고 싶다. 부족하지만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어딘가 있지 않겠는가? 그동안 작지만 쌓은 경험과 넘치게 받은 은택을 세상의 음지에 흘려보내는 숙제가 남아 있다는 부담감이 있다.

 

어려운 세상에는 금, 은 그릇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질그릇도 필요하기에 이런 생각이 점점 내 마음속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물려줄 가장 소중한 유산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쓸쓸히 떨어져 뒹구는 낙엽이 되기보다는 소리 없이 서쪽 하늘로 붉게 넘어가는 석양이 되고 싶다면 이 또한 노욕(老慾)일까?

김유진 서울 강남구 김유진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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