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혁명가(체 게바라)

2023.04.26 15:18:23

박병기 칼럼

내 차에는 365일 하루에 한 편씩 읽는 세계의 명시 ‘내 인생을 평화롭게 만드는 한 편의 시’라는 제목의 시집이 있다. 딸이 중학교에 입학한 후 등하교를 시키고, 학원을 데리고 다닐 때 차에 두었으니 17년이나 내 차를 지키고 있다. 아침잠이 많은 딸은 등교시간에 항상 바쁘다. 딸이 주차장에 내려오면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시동을 켜놓고 시 한 편을 읽고 암기하려 노력해 보았다.

 

체 게바라의 시 ‘행복한 혁명가’를 접하는 순간 가슴이 막막하면서 눈물이 고였다. 삶의 등대를 발견하였다. 그 후 법륜 스님이 해석한 금강경을 읽다가 눈물이 나와 더 이상 책을 읽지 못하고 동네를 하염없이 방황하였던 경험이 있다. 차에서 자녀를 기다리는 시간이 짧을 때는 시집을 잡는다. 일요일에는 자녀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근처 카페에서 책을 보며 기다린다. 수업을 마친 자녀가 전화를 하면 바로 학원 앞으로 간다. 가끔 전화도 하지 않고 카페에 내려와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녀를 발견한다. 만약 책을 보고 있지 않고 잠을 자고 있었다면. 가슴을 쓸어내리는 순간이다. 일요일 아침 자신들을 학원에 데려다주고 집에 가서 쉬지 않고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는 아빠의 모습을 좋아한다.

 

 

행복한 혁명가 체 게바라

 

 

쿠바를 떠날 때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씨를 뿌리고도

열매를 따먹지 못하는

바보 같은 혁명가라고

 

나는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 열매는 이미 나의 것이 아닐뿐더러

난 아직 씨를 뿌려야 할 곳이 많다고

그래서 나는 행복한 혁명가라고

 

오늘날 게바라의 이미지와 유산은 현상유지에 도전하고 더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를 위해 싸우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영감을 주고, 저항과 혁명의 상징이 되고 있다. 그의 이미지는 전 세계의 포스터 티셔츠 및 기타 상품에 사용되고 있다. ‘행복한 혁명가’를 이해하기 위해 게바라의 전기를 사서 읽었다. 글을 쓰기 위해 오랜만에 다시 펼쳐본다.

 

체 게바라(1928.6.14~1967.10.9)는 본명이 아니라 별명이다.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에서 나고 자랐다.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수영과 승마 축구 럭비 사격 비행 골프를 즐겼다.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전공하며 시인을 꿈꾼다. 1951년 졸업시험을 통과하고 의사이며 친구인 알베르토와 500cc 중고 오토바이를 타고 8개월간 4500km의 라틴 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며 사진을 찍는다. 여행을 하면서 사탕수수, 커피, 바나나 농장의 노예들과 광산의 광부들, 빈민가의 빈민들이 빈부격차로 인해 좌절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충격에 빠진다. 미국 자본가들에게 수탈당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들의 실상을 보고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라틴 아메리카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혁명가의 길로 가게 된다.

 

1954년 과테말라 혁명에 참가했다가 탈출한 게바라는 멕시코로 망명한 후 1955년 카스트로를 만나 반군사령관으로서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다. (게바라 나이 30세) 이후 쿠바 국립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에 발탁되어 농업국 쿠바를 산업화하려는 계획의 책임자가 된다. 애초에 금융이나 경제 전문가가 아니라 혁명가였기에 그의 개혁 정책은 실패하게 되어 쿠바의 산업화와 금융정책 등 경제 성적은 전반적으로 나빠진다.

 

1965년 5월 “나는 정치가가 아니라 혁명가이다. 쿠바에서 내가 할 일은 모두 끝났다” 라는 편지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이후 그는 콩고 혁명 투쟁을 지원하다 실패하고 잠시 쿠바로 돌아와 다시 볼리비아 혁명에 가담하였다. 1966년 11월 1967년 10월 부상을 입은 게바라는 미국이 지원하는 볼리비아 반군추격대에게 생포되어 총살된다.

 

자서전에는 게바라가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표현하는 글이 있다. 게바라의 ‘행복한 혁명가’ 시는 노자, 장자의 사상과 일맥 통하는 부분이 많다. 장자에는 이런 글이 있다. ‘송영자는 온 세상이 모두 그를 칭찬하더라도 더 신나지 않았고, 온 세상이 모두 그를 비난하더라도 더 흔들리는 바가 없다. 그는 자기의 내면과 밖의 분수를 뚜렷이 하고 (定乎內外之分 정호내외지분) 영예와 치욕의 한계를 분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게바라는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잘 알았기 때문에 쿠바혁명 정부에서의 모든 직위를 남겨두고 혁명이 필요한 콩고로 떠났다. 과거 혁명은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에서는 선거를 통해 혁명이 이루어진다. 선거를 할 때는 적과 아군의 구분이 뚜렷하다. 선거가 끝나면 당선자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개혁을 하게 된다. 개혁의 과정은 나에게 투표한 사람을 위한 정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개혁은 선거권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정책을 펼쳐야 한다. 그래야 임기를 마칠 때 성공한 리더로 인정받는 것이다. 혁명을 할 때 필요한 인재와 개혁을 할 때 필요한 인재는 다를 것이다. 리더의 가장 큰 덕목은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여 개혁을 성공시켜야 하는 것이다. 개혁은 동(同)이 아니라 화(和)이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병기 함께하는 대덕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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