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과 노인을 돌보려는 노력이 때로 쓸데없이 느껴질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등록 2025.05.28 16: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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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윤리학자에게 물어본다(76)

<The New York Times>에 오랫동안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 “The Ethicist”가 있습니다. 현재 뉴욕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윤리학자 콰매 앤터니 애피아가 맡은 이 칼럼은 독자가 보내는 윤리 관련 질문에 윤리학자가 답하는 방식으로 꾸려지고 있습니다. 치의신보에서 매월 1회 의료윤리 주제로 같은 형식 코너를 운영해 치과계 현안에서부터 치과 의료인이 겪는 고민까지 다뤄보려 합니다.<편집자주>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약력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졸, 동병원 소아치과 수련.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윤리 및 건강정책 교실 생명윤리 석사.

연세치대 치의학교육학교실 교수
저서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2018),
역서 <의료인문학과 의학 교육>(2018) 등.

 

 

 

 

 

 

 

치과의사로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대전제는 이해합니다만, 실제 임상 현장에서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컨대, 지금 장애인이나 노인에 대한 구강 관리를 확대하는 정책적 방향을 보면, 결과적으로 크게 바꾸는 것도 없는데 한강투석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죠. 직접 치료를 해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는 데다, 정말 환자에게 이득이 되는가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익명>


돌봄에 관한 강의 자리에서 한 선생님께서 주신 질문을 허락 없이 옮겨봅니다. 표현을 많이 수정했으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저도 소아치과 수련을 받은 사람으로,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장애인 환자 치료에 관여해 온 경험을 통해 선생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합니다. 치과의사로서 저희는 어떤 치료 술식을 시행하여 환자 구강을 직접적으로 바꾸거나, 구강위생 교육 수행과 환자의 이행을 통해 환자의 예방 노력을 관찰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리고 장애인, 노인, 만성질환자 치료는 여기에서 벗어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환자가 치과에 내원하는 것도 어렵고, 오셔서 치료를 받으실 수 있는 시간도 상대적으로 짧지요. 그러다 보니 치료 범위도 한정이 됩니다. 위생 교육을 해도, 스스로 잘 이행하실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는데다가 다른 돌봄 제공자들은 구강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보니 치과의료인의 교육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는 경우가 왕왕 있지요.

 

그렇다면, 재가 의료든 시설 방문이든 심지어 촉탁의든, 이들을 위해 치과 의료 접근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무용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바위를 계속 굴려 올리지만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는 시시포스처럼 말입니다.


일단, 치과가 워낙 실천적인 분야라서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치의학은 전문화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외과의 전문 세부 분과로서 떨어져 나왔고, 직접 환자의 상태를 술식으로 바꾸는 것에 익숙하니까요. 20세기 후반 예방치과나 구강내과 영역이 부각되었다고 해도, 정체성이 그렇게 쉽게 변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한편, 이것은 꼭 치과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돌봄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의 특징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환자의 상태가 크게 개선될 수 없는 상황에서, 환자를 살피는 일은 때로 중과부적이라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게 하니까요.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망가지는 것을 가치의 상실 또는 무가치함에 연결 짓기 때문으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망가지면 가치가 낮아지는 건 당연하지요. 제 손 앞에 있는 물건, 예를 들어 지금 글을 치고 있는 키보드가 망가져서 몇 개의 키가 눌리지 않거나, 심지어 아예 작동하지 않는다면 키보드는 그 가치를 상실합니다. 우리가 만나고 다루는 우리 손안의 물건들은 모두 마찬가지지요.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 망가짐과 가치 소멸 사이에 등식을 부여하며, 최초의 상태가 가장 뛰어나고 가치 있다는 평가 체계를 만들어 내는 것 같습니다. 물건은 역시 신상이니까요. 아무리 다이아몬드가 변치 않는 사랑의 표상이라 한들, 반지 곽에서 처음 꺼낼 때가 가장 아름다울 테니까요. 처음의 순수함과 완전함을 시간의 흐름은 파괴해 갑니다. 점차 모든 것들은 가치를 빼앗기고, 쓸모없는 것들로 바뀝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겠지요. 태어났을 때의 아름다움은 점차 노년의 추함으로 대체되어 갑니다.

 

여기에서 물음표를 떠올리셨을까요. 물론, 처음이 지닌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새로운 것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지요. 하지만, 우리의 삶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치를 소멸해 갈 뿐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간의 흐름은 우리의 몸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의 퇴적은 그 자체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렇기에 오랜 경험의 자국으로 만들어진 변형된 신체는 다른 아름다움을 지니지요. 이전에 많이 회자했던, 발레리나 강수진 씨의 발 사진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굳은살로, 오랜 훈련으로 울퉁불퉁하게 변형된 발. 하지만 그 발은 매끈한 청년의 발과 다르니 추하고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별로 없을 거예요. 조금 더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 몸은 물건과 달리, 그 오랜 쓰임이 낳는 가치를 그 형태 안에 기입해 갑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돌봄의 이해에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책 『돌봄의 역설: 모두가 원하지만 아무도 하고 싶지 않은』에서도 다른 작품을 경유하여 검토한 바 있는 생각, 우리의 손상된 몸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물론, 병에 걸리는 게 좋다고, 심지어 병에 걸려야 한다고 말씀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환자의, 노인의, 장애인의 몸에는 질병과 장애로 인한 흔적들이 쌓입니다. 그것은 때로 고통과 고난의 흔적이기도 할 거예요. 그것은 때로 즐거움과 감사의 흔적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 흔적에 가치를 쌓는 것은 경험 자체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그 시간을 함께한 돌봄의 손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선 발레리나의 발 예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니냐고 하실 수도 있는데, 저는 노력과 훈련을 통해 개인의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 “피어남”을 돌봄의 가장 중요한 속성으로 꼽아요. 그리고 발레리나의 발은 자신을 돌본 이의 하나의 귀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저희의 돌봄이 조건의 한계로 인하여 당장 건강의 개선으로 이어질 수 없다 해도, 그 노력은 지워지지 않을 거예요. 돌봄의 시간은 흔적으로 쌓이고, 그것은 보살핌받는 이의 손상된, 손상되어 가는 몸을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실천입니다.


물론, 무엇보다 이런 노력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풍토가 조성되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이 글을 띄워 봅니다. 이런 생각이 가닿아, 우리의 돌봄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서요.

 

 

▶▶▶선생님이 진료하시거나 치과의사로 생활하시면서 가지셨던 윤리와 관련한 질문을 기다립니다.
dentalethicist@gmail.com으로 보내주십시오.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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