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은 원래 건축학개론 영화 포스터의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를 조금 변형해보았습니다. 건축학개론 같은 영화든 히어로가 나오는 영화든 주인공은 모두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런 영화를 볼 때 주인공의 시점에서 힘든 감정을 느끼나 내가 실제 주인공이 아니기에 관객의 시점에서 그 감정을 이입해서 봅니다. 그래서 그 무서운 슬래셔 무비와 같은 공포영화를 봐도 우리가 패닉에 빠지지 않는 것은 우리는 실제 그 주인공이 아니라 관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나는 내 육신 그 자체가 아니라 외계생명체인데 우연히 기억을 잃고 떨어져서 지구상을 헤매다가 우연히 기억을 잃은 채 지금의 이 육신에 깃든 존재라는 설정입니다. 마치 ‘별에서 온 그대’의 김수현과 같이 태곳적 오래부터 살아왔고 언젠가 다시 고향인 우주로 돌아가야 하나 그러한 기억이 없고 이 육신에 잠시 머무는 존재라고 합시다. 고향인 우주는 기억이 안나나 내가 실제 내가 아니고 이 육신도 내가 잠시 빌려 쓰는 존재이면 나는 현재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요? 마치 제 두 눈의 안구에 맺히는 스크린을 보는 관객이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지금 칼럼을 쓰기 전에 고민하면서 제목을 ‘스스로를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보기’로 지어서 볼까 생각했었습니다. 나의 육신은 아바타와 같은 것이지요. 저는 매트릭스에 갇혀 있는 존재이므로 사실 매트릭스의 내가 진짜 내가 아니라 인식하는 내가 진짜 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까지 생각을 하게 되냐면 인생은 고통이고 인정욕구에서 벗어나고 나는 누군가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부터 내가 평가하는 나와 평가당하는 나로 분열시켜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충코의 철학’ 유튜브 채널의 ‘나는 내가 아니다’라는 콘텐츠에서 들은 내용입니다.
스파이더맨의 주인공이 고초를 겪을 때 응원하면서도 주인공 스파이더맨만큼 힘들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스파이더맨 자체가 아니라 관객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인공이 안 힘들고 항상 승승장구하는 먼치킨이면 좋겠지만 그런 영화나 현실은 없죠. 그리고 사실 그런 스토리는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영화의 배우를 믿고 지금은 힘드나 그 힘든 감정은 타자화하여 너무 몰입하지 않고 어려움을 이겨내고 긍정적인 미래가 될 것이라고 상상하며 영화를 봅니다. 희로애락(喜怒哀樂) 가운데 노(怒)와 애(哀)는 덜 고통스럽게 오히려 인생의 양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배우 그 자체이기보다 관객이기에 배우와는 다르게 어떻게 인식할지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고 이왕이면 긍정적으로 인식한다면 인생은 덜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배우라는 역할도 항상 고정적인 배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다른 배역을 맡을 수도 있다라고 인정하게 됩니다. 2022년에 ‘미라클모닝 실패기’라는 칼럼을 썼을 때의 저라는 배우와 그 전에 미라클모닝을 하는 배우, 그리고 지금의 나라는 배우는 완전히 다른 배역을 각각 수행하였습니다. 이것말고도 제가 이전에 하던 생각, 추구하는 방향과 지금은 전혀 다르게 사는 부분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리고 제 예상과 다르게 다른 배역이 어느 날 갑자기 빨리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저는 그 배역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그때 선택할 뿐입니다. 즉 인식을 선택하는 관객을 넘어서 내가 어떤 배역을 맡을지도 선택하는 경지에 간다면 조금 더 우리의 인생은 덜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이만 글을 마치겠습니다. 지금 이 생(生)을 살아가는 모든 배우, 아바타 그리고 인식하는 관객을 응원합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