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작성할 원고 일정에 대한 연락을 받고 나면, 먼저 치의신보 홈페이지에 접속해 이전에 실린 원고들을 살펴보곤 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바가 크게 다르지 않다 보니 결국 비슷한 이야기를 쓰게 될 수밖에 없겠지만, 최소한 같은 주제로 글을 쓰는 일만은 피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지금껏 작성한 원고를 거슬러 올라가 본과 3학년이던 2017년까지를 돌아보았습니다. 오랜 시간 부족한 글이, 그것도 원내생 시절의 경험부터 개인적인 일상까지 자세히 적어왔던 탓에 졸업과 인턴·수련 과정은 물론 결혼과 출산에 이르기까지 삶의 여러 장면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다시 읽어보니 신변잡기를 이렇게까지 자세히 공개했나 싶은 마음에 부끄럽기도 합니다.
간혹 일기처럼 자세히 남겨둔 글이 도움을 줄 때도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러하였는데, 2021년 겨울, 외할아버지의 별세 이후 송고하였던 원고를 통해 당시의 소회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5년이 지나 이번 겨울에 떠나보낸 외할머니의 임종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과거에는 비통함까지는 아니더라도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이 가장 컸던 반면, 이번에는 용역 취급을 받는 외손의 역할이 어디까지여야 하는가에 대한 못마땅한 마음, 그리고 제 가족과 일터에 대한 걱정이 앞서며 이별의 아쉬움은 상대적으로 가려졌던 것 같습니다.
어느새 ‘성인’을 지나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을 벌고 분가를 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아내와 자녀를 먼저 걱정하게 되고,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일터를 갖게 된, ‘어른’ 말입니다. 어른이 되는 과정이 자연스러운 일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환자에게 “노화에 의한 것이니 받아들이셔야 합니다”라고 의례적으로 하는 말을 스스로 받아들이기에는 마음 한편이 어딘가 착잡하고 복잡합니다.
빈소에서 오간 여러 이야기 가운데 유독 마음에 남은 말이 있었습니다. 윗세대의 임종은 아랫세대로의 세대교체를 의미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대학에서는 교육자로, 학계에서는 신진 연구자로, 가정에서는 두 자녀의 아버지로 새로운 역할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게 그 말은 경종이었습니다. 비로소 제가 중심이 되어 살아가야 할 세대가 되었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제 다음을 이어갈 세대를 준비해야 할 책임이 시작되었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격적으로 교직을 시작하며 가장 놀라웠던 점은, 전임의 시절 시간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체감하지 못했던 수많은 행정업무의 존재였습니다. 수업만 잘 준비하면 될 줄 알았던 생각과 달리 강의계획서 작성, 학생 상담, 강의 품질 개선 보고서, 각종 회의 참석 등 교육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업무가 쉼 없이 이어졌습니다. 때로는 이 많은 일이 과연 꼭 필요한 것인지, 혹시 쓸모없는 일에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만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귀찮고 번거롭게만 느껴졌던 이 과정들이 사실은 다음 세대를 안정적으로 준비시키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자녀 교육에 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듯합니다. 무심코 던진 말을 고스란히 기억했다가 똑같이 따라 하는 첫째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다음 직계 세대에게 전해지는 말과 태도 하나하나를 결코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라는 질문에 대충 얼버무리거나, 사고와 호기심이 한창 폭발하는 순간에 피곤하다는 이유로 관심을 닫아버렸던 제 모습을 돌아보며 반성하게 됩니다. 아이들의 거울이 부모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합니다.
예방치과라는 학문 분야의 신진 연구자로서의 역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직은 신진의 앞가림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녹록지 않은 학계의 현실을 고려할 때 다음 세대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처럼 느껴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래된 임상 술식과 연구 관행 또한 필요하다면 세대교체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 과정과 성과를 충분히 남겨 다음 세대가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는 역할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훗날 순리대로 교체되어야 하는 나의 세대를 바라보며, 흘러버린 시간과 변해가는 마음을 아쉬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저 앞선 세대의 선배들께서 그러하셨듯, 다음 세대에 남길 것들을 분명히 남기고 장렬히 퇴장하되, 책임 있게 유전자를 각인하고 자리를 넘겨주는 세대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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