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에서의 하룻밤 3 순천 해룡성고택(10면)

  • 등록 2012.07.0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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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에서의 하룻밤 3 순천 해룡성고택


남도의 여름은 바다를 건너온다. 비릿한 바다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뭍으로 불어오면서 여름작물을 키워낸다. 해룡성(海龍城)고택이 있는 순천시 홍내동(홍두길 136)에는 벌써 몇 번의 미나리를 수확한 흔적이 보인다. 이제는 억세진 미나리가 계절이 한 여름에 들어서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남도끝자락 시골마을 

세상 시름 저 멀리

  

한적한 시골에 아늑한 기와집
고택보다는 외갓집체험 분위기
황토 구들방서 하룻밤 피로 날려

  

여수 엑스포 바람이 이곳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여수의 숙박난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해룡성고택을 찾는 이가 많아진 것은 비단 그것 뿐만은 아닐 터다. 옛것에 대한 향기를 느끼려는 고택 애호가가 아니라면 남도끝자락 시골 마을에 자리한 해룡성 고택을 찾아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일 것이다. 


순천만을 끼고 도는 곳에 해룡성 고택이 있다. 그 길은 요즘 공사가 한창이다. 2013년에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에서 열리는 세계정원박람회 준비를 위한 기반시설 공사다. 올해 여수해양엑스포에 이어 남도(남해안)에서 열리는 또 하나의 국제 이벤트다. 세계적인 행사를 하는 것은 좋지만 많은 공간을 개발하는 모습이 마냥 좋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혹여 순천만 생태습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해룡성 고택은 이 개발의 공사소리가 요란한 산을 끼고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여느 고택처럼 대단한 규모는 아니다. 화려함과도 거리가 있다. 그저 본체와 사랑채 행랑채가 있고 사당과 제당이 있는 기본적인 고택 형식이다. 언듯 보기에는 일반 서민층의 가옥구조와 비슷하다. 하지만 이 고택은 1776년에 지어진 아주 오래된 집이다.


해룡성고택은 이 집 소유주인  문창훈 선생의 7대 조부인 청계(淸溪)문효광 선생이 지었다. 청계선생은 초야에 묻혀 벼슬과 거리를 둔 선비였지만 갯벌을 개척해 농사를 짓고 염전을 운영하며 부를 축적한 천석지기 부자였다.  


이들은 남평문씨의 후손이다. 원래 이들의 세거지는 장흥이었으나 청계선생이 순천으로 입향해 순천파(순천문중)를 형성했다. 장흥에 세거지를 두었던 남평문씨 가문은 충과 효를 중시했으며 정당한 노동의 결과를 얻으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풍암 문위세 선생(文緯世, 1534~1600)이다. ‘풍암유실기’에는 다음과 같이 그의 이력이 기록돼 있다.


“자는 숙장, 호는 풍암이며 본관은 남평이다. 삼우당 문익점(1311˜1400)의 9대손이다. 1534년(중종 29) 9월 11일 부산방 춘정촌에서 출생하였다. 윤효정의 외손이었기 때문에 일찍이 외숙부인 귤정 윤구에게 수학한 뒤 미암 유희춘(1513˜1577)과 퇴계 이황(1501˜1570)에게 수학하였다. 1567년(명종 22)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기보다는 오직 학문연구에 전심을 다했다. 당대의 명유들과 교유하였으나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모든 교유를 끊고 두문불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1592년 59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죽천 박광전(1526˜1597), 삼도 임계영(1528˜1597), 정사제(1556˜1592)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미를 조달함에 힘써 그 공으로 1595년(선조 28) 용담 현령에 제수되었다. 이어 정유재란 때에도 읍민을 동원하여 왜병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무찌른 공으로 1600(선조 33) 파주 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용문산과 월천에 퇴거하여 지내다 3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남평문씨 사료에 따르면 풍암선생은 1547년(14세)에는 안동 도산서원에서 퇴계 이황(1501-1507)선생으로부터 제갈공명의 팔진도법의 군사조련용병술을 배웠으며 성리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풍암 선생은 집안 노비와 종 100여명을 이끌고 낙안 순천을 경유해 남원에 도착해 전라 좌의병 작전참모겸 양곡관의 보직을 맡아 의병대의 군량미 확보,조달 총책을 맡았다. 그는 장수, 무주, 금산전투에서 뛰어난 지략을 세워 ‘제갈량’으로 불렸으며 흰옷 입은 의병장이란 뜻의 ‘백의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풍암선생은 만년에 장흥 유치면 늑용리에 사군대(思君臺)를 짓고 가야금과 글을 벗하다가 그해 세상을 떠났다. 1644년에는 그의 학덕을 흠모한 선비들과 후손들이 월천사(月川祠)를 설립하고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고관대작의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우국애민(憂國愛民)선비정신으로 민초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기품이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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