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가풍을 가진 풍암선생의 5대손인 청계선생은 관직에 나가는 것보다 순천을 고향으로 삼아 갯벌개척과 염전으로 부를 이루어 순천만의 천석지기가 되어 지은 집이 해룡성고택이다. 그들의 부는 오로지 땀을 흘리며 열심히 노동한 대가였다. 하지만 해룡성고택을 찾아오는 손님에게는 언제나 넉넉한 인심을 베풀었다고 한다. 사랑채를 항상 개방해 며칠이고 음식을 제공하는 인심 좋은 집안의 명성을 이어왔다고 한다.
양쪽에 얕은 산을 끼고 움푹 들어간 자리에 자리한 해룡성 고택은 평사낙안(平沙落雁)의 지형이다. ‘넓은 모래 벌판에 기러기가 내려앉은 형국의 땅’이라는 뜻이다. 해룡성(海龍城)의 명칭은 통일신라의 대업을 완성한 문무왕의 아호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삼국시대 때는 이 일대가 바다를 접하고 있었다고 한다. 백제시대 때는 ‘담로성’(마한을 정벌해 구축한 식민지성)이라 불리면서 남해열도와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쳤으며 담로성 앞에는 ‘사비포’라는 항구가 있었다고 한다. 이 사비포항은 고대 해상세력의 거점 역할을 하며 여수 순천 광양 돌산 등을 관장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도 해룡성에는 쌀창고가 만들어져 쌀을 배로 실어나르는 요충지 역할을 했다. 하지만 고려 말 왜구의 잦은 출현으로 폐허가 됐으며 조선시대에는 간척을 통해 갯벌이 육지화 되기 시작해 현재는 성의 흔적만 보일 뿐이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해룡성의 역사를 품고 조선중기에 해룡성고택이 건립됐다. 당시의 규모는 아마도 마을 입구에 행랑채가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되는 유구가 마을입구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규모는 과거 역사만큼 화려하지 않다. 오랫동안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수줍은 선비의 기품처럼 그저 한적한 시골의 아늑한 기와집 정도다. 고택의 흔적 역시 안채의 골격에서 느낄 정도다. 그나마 최근에 고택입구 행랑채를 새로 짓고 사랑채를 손질해 길손들을 받고 있다. 고택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사랑채가 보이고 좌측 안채가 보인다. 남도지역이라 마당에서 야자수가 제법 자라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고택의 풍모는 안채에서 찾을 수 있다. 휘어진 적송(홍송)을 사용해 만든 대들보는 고택을 지을 당시 집에 기울인 정성을 말해준다. 안채의 맨 건넌방은 황토로 된 구들방으로 230년이 넘은 지금도 건축당시의 모습대로 유지되고 있다. 전통한옥 체험을 하고 싶은 여행객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다.
안채의 중앙 안방은 제일 큰 방으로 고택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두 칸을 터서 만든 이곳에는 잘 건조된 홍송 서까래가 전통한옥의 느낌을 잘 살려준다. 불청객의 방문에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차를 내어온 문창훈 선생은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을 일러주었다.
“孝悌忠信 禮家兵學 稼穡樹種之法 (효제충신 예가병학 가색수종지법) / 진정으로 효도하고 우애하라. 예의를 지키고 힘을 기르라. 씨를 뿌리고 거두는 방법을 배워라.”
이 가르침을 근간으로 해룡성 고택은 유지되어 오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선대의 별세로 한동안 비어 있었지만 문창훈 선생이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낙향해 길손들을 받고 있다. 고택의 위용을 살리기 위해 용마루와 치미를 올려봄이 어떠할까 하고 제안을 해 보지만 주인은 손사래를 친다.
“우리 선대 어른들은 대대로 내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오죽하면 관직도 마다하고 낙향해 평범하게 살려고 했겠습니까. 그저 깨끗하게 집안을 정리해 이 고택에 깃들어 있는 정신을 느끼고 가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해룡성 고택을 나오면서 생각해 본다.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고택만 고택이라 할 수 있을까. 해룡성 고택처럼 외형은 초라(?)해도 그 속에 들어 있는 가문의 전통이 훌륭하다면 글을 쓰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여태동 / 고택칼럼니스트
#하룻밤 정보
안채와 사랑채 별채의 총 7칸을 쓸 수 있다. 단체와 개인 모두 가능하다. 주인인 문창훈 선생이 직접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그는 서울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다 퇴임해 이 고택에 머물며 조상들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 고택이라기보다는 외갓집을 체험하는 분위기다.
주변에 빽빽이 둘러선 대나무가 있어 매일 아침 새소리가 잠을 깨울 정도다. 주말에는 예약이 필수이며 주중에도 전화를 걸어 예약상황을 체크해서 하룻밤 머물 수 있다. 취사도구가 있어 음식을 준비해 가도 되고 바베큐도 가능하다. 식사를 고택에서 해결할 경우에는 예약이 필수다. (061)744-1760, 010-4205-11
#주변 볼거리
인근에 세계5대 연안습지인 순천만이 있어 자연생태체험을 할 수 있다. 순천만은 순천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동천과 이사천이 한곳으로 만나 바다와 합쳐지는 곳에 만들어진 드넓은 갯벌이다.
갈대밭이 끝없이 펼쳐지고 바다위로 삼산이 보인다. 이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강남과 비교하여 ‘삼산과 이수가 있는 소 강남’으로 불렀다. 순천만 이외에도 인근에는 송광사, 낙안읍성, 선암사가 있으며 보성 녹차 밭과 고막으로 유명한 벌교가 지천이다. 요즘은 8월까지 펼쳐지는 여수엑스포 구경이 제격이다.
#찾아가는 길
서울에서 승용차로 갈 때는 천안-논산 고속도로를 거쳐 전주에서 광양으로 개통된 고속도로를 이용해 순천으로 들어가면 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고속버스 터미널을 이용해 순천행을 이용하거나 KTX를 이용해 순천에 도착해 순천시내에서 67번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하지만 시간이 자주 있지 않아 택시를 이용하면 1만원 내외다.
광주나 경상도 지역에서 올 때는 남해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된다. 목포 쪽에서 방문할 때는 최근 개통된 목포-광양 고속도로를 이용해 순천만으로 들어오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