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에서의 하룻밤(4) 함평 모평마을 (19면)

  • 등록 2012.08.0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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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에서의 하룻밤(4)

함평 모평마을


 고즈넉한 흙돌담을 맞대고 살아가는 마을은 시간을 초월하고 있다. 바람에 서걱거리는 대숲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고 천년샘물이 찰랑찰랑 넘친다. 언덕배기 정자에 오르면 마을이 한눈에 보이고 그곳에 앉아 차 한잔을 마시면 세상의 근심걱정이 사라진다.

  

한옥에서
느끼는 편안함“그래 이맛이야”

 

흙돌담 맞대고 사는 윤씨 집성촌
영양재 귀령재 모평헌 고택 즐비
‘전남 행복마을’로 지정 품격마을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에 들면 누릴 수 있는 정취다. 해보천이 흐르고 임천산이 감싸 안은 아늑한 마을에는 야생차밭과 산죽 사이를 훑고 지나는 바람소리가 청량하다. 흙돌담이 골목마다 즐비한 집안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체 과거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다.


마을 전체가 한옥으로 지어져 있고 오랜 고택이 중간 중간에 자리하고 있어 마을의 품격이 느껴지는 곳이다. 하지만 이 마을도 농촌지역이라 낙후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농어촌 마을을 살고 싶은 마을로 만들어 주민들과 후손들이 정착하고, 도시민들이 돌아오는 마을로 만들기 위해 전라남도가 조성하는 행복마을로 지정돼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함평(咸平)은 조선 태종 9년(1409)에 함풍현과 모평현을 합치면서 이름이 만들어졌다. 함풍에서 ‘함(咸)’자를, 모평에서 ‘모(平)’자를 따서 지은 지명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모평마을은 함평군의 모태와 같은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모평마을은 고려시대 때 함평 모씨(牟氏)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조선 세조때 제주도 귀양길에서 돌아오던 윤길(尹吉)선생이 90세의 나이로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파평 윤씨 집성촌으로 변했다. 원래 고향이 황해도 평산이었던 윤길선생은 사촌자형(사촌 누나의 남편)이었던 김종서 장군(1383~1453)이 단종복위 사건에 휘말려 죽자 제문을 지어 “직재(김종서)는 죽을 때 죽었으니 만고에 빛날 것이다”라고 읊었다고 한다. 그 소식이 세조의 귀에 들어가 괘씸죄로 제주로 귀양살이를 갔다가 외척인 관계로 사면돼 목포를 거쳐 돌아오다가 모평마을에 정착한다. 


현재 마을 주민 57가구 130여 명 중 100여 명 이상이 파평 윤씨다. 이들은 선대조상이었던 고려의 윤관장군의 사당인 수벽사(修闢祠)를 지어 추앙하면서 모평마을을 지켜오고 있다.


수벽사 옆 제각 안에는 열녀비가 있는데 정유재란 때 남편이 왜병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막으려다 두 팔이 잘려나가면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신천 강씨를 기리고 있다. 강 씨가 죽고 어린 아들만 남게 되자 그녀의 노비인 도생과 사월부부가 아들을 뒷바라지해 과거에 급제시켰다. 후에 아들은 노비부부가 죽자 공적을 기리는 비를 세워 기렸다고 한다. 파평윤씨 문중에서는 지금껏 노비에게 제를 올려주고 있다. 신분의 귀함과 천함이 엄연했던 시대에 신분을 초월한 인간애가 느껴지는 비석이다.


모평마을의 화룡점정은 영양재(潁陽齋)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잡은 영양재는 마을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21면에 계속>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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