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에서의 하룻밤(5)
영월 주천고택 조견당(照見堂)
여름의 끝자락이다. 8월 7일이 입추이자 말복이었으니 서늘한 바람이 불만도 한데 아직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직장인들의 달콤했던 여름휴가의 추억도 생각의 한쪽 끄트머리에 정돈해야 할 시기다. 그래도 늦게 휴가를 얻어 뭔가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다는 상념에 잠긴 독자라면 강원도 영원군 주천면에 위치한 주천고택 조견당(照見堂, 강원도문화재자료 제71호)으로의 체험여행을 권한다.
해와 달과 별을 품은 집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공동체 공간
철학적 사유공간으로 의미 더해
주변 다양한 박물관도 볼거리
주천고택 조견당은 ‘반야심경’의 한 구절인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조선말기인 1827년에 완공된 이 고택의 주인은 인근에 위치한 법흥사 스님들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조견당이 법흥사의 주천포교당 정도가 되었을 법하다는 것.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각자 “오온(五蘊) 즉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물질적 정신적 작용으로 일어나고 인식되는 다섯가지의 경계를 조용히 비추어 보면 모두 공하다”는 의미를 담아냈다. 결국 이 고택은 ‘밖으로 흐트러진 세상의 번거로운 번뇌를 내면 깊숙한 곳에서 관조하며 차분하게 가라앉히라’는 뜻을 담고 있다.
조견당을 지은 사람은 김해김씨 안경공파의 한 가문이었던 김낙배 선생(주천마을 입향조)의 증손자인 김현만 선생이다. 김낙배 선생은 조선 숙종 연간에 한양에서 양반으로 권문세가의 위세를 떨쳤으나 당쟁에 휘말려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제천과 충주 사이에 있는 귀례라는 지역으로 은둔한다. 3년여 동안 숨어 있는 김낙배 선생은 그곳에 정착하기가 어려워 다시 원주로 옮기게 된다.
그러던 중 한 귀인 나타나 “치악산 끝자락인 망산에 가면 머물기 좋은 땅이 나올 것”이라고 일러 준다. 김낙배 선생은 그 말을 듣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주천에 도착해 보니 과연 자신이 세거지로 삼을 만한 지역이 나왔다. 마을 산등성이에 ‘빙허루’라는 누각이 있고 주천강이 유유히 흐르는 길지(吉地)가 눈앞에 나타났다.
아무 망설임 없이 이곳에 정착한 김낙배 선생은 주천강 선착장을 인수해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당시 주천지역은 남한강과 동강에서 배가 들어오는 선착장이 있던 지역이어서 장사를 하기에는 좋은 여건이었다. 그는 양반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중인으로 상업에 뛰어드는 실리를 취한다.
지역에서 나오는 약재와 목재 잡곡(곡물)을 확보해 수로를 통해 올라오는 젓갈과 소금을 사들여 부를 축적한 김낙배 선생은 지역의 부호가 되기까지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조선에서 유명한 인삼·모피 등을 확보해 북쪽으로는 황해도 의주까지 올라가 서양에서 들어온 물건과 맞바꾸기도 했다. 남쪽으로는 부산 동래까지 진출해 일본을 통해 건너온 물건을 사들여 국내에 유통시키기도 했다.
가업은 대물림이 되었고 부는 계속 축적됐다. 김낙배 선생의 증손자인 김현만 선생은 주천에 안착하기 위해 40칸 규모의 집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집을 짓는다는 소식이 사방에 알려지자 전국에서 집을 짓는데 일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왔다.
당시에 집 짓는 일을 한다는 것은 먹을 것을 준다는 의미와 상통했다. 당사자뿐만 아니라 굶주리는 가족의 끼니까지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주천강변 소나무 숲에 장사진을 이뤘다고 한다.
베품에 인색하지 않았던 김현만 선생은 민초의 굶주림을 그냥 넘길 수가 없어 9년에 걸쳐 99칸의 대저택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 100칸을 넘지 못하게 집을 짓는 규율이 있었지만 실제 조견당은 주천강 입구에 따로 20여칸을 지어 실제 규모는 120칸이 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주천고택 조견당은 크게 행랑채와 동별당, 서별당, 바같 사랑채와 안 사랑채, 안채, 사당 등의 구조로 지어졌다. 하지만 1941년때 일제시대 때 제방을 축조하면서 행랑채와 부속건물이 소나무 숲과 함께 훼손돼 버렸고 현재 안채를 제외한 나머지는 6·25때 폭격으로 소실돼 버렸다. 한국전쟁 때 조견당은 인민군의 연대본부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그나마 안채가 보존 될 수 있었던 것은 안채 옆에 자라고 있던 500여년이 된 밤나무가 안채를 가려주었기 때문이란다. 보호수로 지정되었던 밤나무는 몇 년 전 고사(枯死)돼 버렸고, 그 후손이 되는 어린 밤나무가 안채 뒤편 밭에서 자라고 있다. 세월의 영고성쇠(榮枯盛衰)에 남아 있는 안채마저도 전쟁의 상흔에 3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고택을 복원하려는 후손들의 노력으로 안 사랑채와 바깥 사랑채 별채가 복원돼 이제는 고택의 기품을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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