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에서의 하룻밤 (6) 홍성 사운고택 우화정
몇 번의 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하더니 아침 저녁으로 제법 찬바람이 분다. 이럴 때면 옛날 시골집 황토방과 구둘장 아랫목이 그리워진다. 추석 때 다녀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면 홍성 사운고택 우화정으로 떠나보길 권한다.
노송 어우러진 고택 ‘황홀’
충남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309(홍남동로 989-22)번지에 위치한 사운고택은 양주조씨 충정공파의 종가다. 충정공은 조계원(趙啓遠, 1592~1670)선생의 호다. 그는 인조임금 때 호조판서를 지낸 조존성 선생의 아들이며 영의정을 지낸 신흠(1566∼1628)선생의 사위이기도 했다. 그의 손자인 조태벽(趙泰碧, 1645~1719)선생이 이 고택을 지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고택 소유주인 조환웅 선생의 부친의 이름을 본 따 ‘조응식 가옥’이라고 불리는 이 고택은 국가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198호로 지정돼 있다. 사운고택이라 불리는 연유는 조환웅 선생의 고종조인 조중세(趙重世1847~1898)선생의 호가 사운(士雲)이었기 때문이다. 구름처럼 유유자적하는 선비이거나 구름처럼 세속에 관심없이 유유자적하는 선비라는 뜻으로 다가온다.
세속에 있으면서 세속의 명리를 탐하지 않았던 사운선생은 세상에 자비를 베푸는 따스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문경현감으로 있을 때 심한 기근이 들자 홍성 본가에서 곡식을 실어 날라 사람들을 구휼하는 자비심을 보였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시기에 어느 현감이 자기의 곡간을 열어 백성을 위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그의 행적은 ‘조선왕조실록’에 오롯하게 기록돼 있다고 한다.
또한 고종년에는 의병에게 군량미를 지원하기도 했다. 1895년 10월 명성왕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를 당한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울분을 참지 못한 홍주(홍성)지역 유생들과 민중들이 봉기했다. 이들은 광천에서 의병을 모으더니 홍주성을 점령한다. 이후 청양의 이봉학·이세영·정정하·박창로 선생이 수백 명의 의병을 일으켜 홍주로 집결했다. 여기에서는 이설 홍건 등 전직 관리들도 합세하여 외세를 몰아내겠다는 의지가 하늘을 찔렀다. 이에 사운고택에서는 이들 의병에게 쌀 239두를 보내 사기를 북돋웠다고 한다.
이 고택의 또 다른 이름은 우화정(雨花亭)이다. ‘꽃비가 내리는 정자’라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조선 영조 때의 문신이자 서예가였던 자하 신위 선생이 직접 글을 써서 달아준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렀고, 14살 때 정조가 궁중으로 불러들여 크게 칭찬하고 사랑했으며 정조 23년,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를 거쳐 이조참판까지 올랐다. 그가 봄볕 좋은 어느 날 이 고택에 머물렀는데 집 앞 벚나무에서 꽃잎이 비처럼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서 ‘우화정(雨花亭)’이라는 글을 썼다고 한다.
조계원 선생의 조카는 인조임금의 부인인 장열왕후((莊烈王后)였다. 장열왕후는 인조 16년(1638)인 15세 때 왕비로 책봉돼 숙종 14년(1688)인 65세로 승하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왕실의 여인이었다. 조대비로 이름이 더 알려진 장열왕후는 1651년 효종으로부터 존호를 받아 자의대비라 불렸으며 1659년 효종임금이 세상을 뜨자 대왕대비에 올라 섭정을 펼치기도 했다.
한 때는 수 많은 전답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비판이 대상이 됐기도 하지만 근대 토지개혁 때 많이 유실돼 지금은 고택과 약간의 임야만 소유하고 있다.
사운고택 사랑채 서쪽에는 쌀을 수백가마 넣을 수 있는 5칸의 겹집 형태의 곳간이 있다. 이 창고는 기근이 들거나 백성이 굶주릴 때는 어김없이 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