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6번째) 아버지의 자전거(하)

  • 등록 2013.03.0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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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y Essay
제1816번째


아버지의 자전거(하)


집안에 손자 손녀들이 태어날때마다 아버지는 감나무며 대추나무, 배나무 묘목을 대야장터에서 사다가 손자손녀의 이름을 붙여가며 심곤하셨다. 일종의 기념식수를 하셨던 셈이다. 추운 겨울날이면 학교를 다녀온 막내아들을 보시고는 아랫목 요를 들추시면서 춥다며 어여 들어오라고 아랫목을 내주시곤 하셨던 아버지다. 요를 들어 올려 속으로 들어갈라 치면 밥공기 뚜껑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벗겨진다. 아버지가 막내아들 뜨신 밥 먹으라며 넣어 두신 게다. 정겨운 기억이다.


아버지에 관한 가슴 시린 기억도 있다.


고 3때 원서를 쓰는데, 진학상담을 위해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했다. 학부모상담이 있던 날,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아버지가 오시기도 전에 원서를 써가지고 지원할 대학에 가버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담임선생님을 만나러 오신 아버지는 이미 막내아들이 원서를 써가지고 갔다는 담임선생님의 말만 듣고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한다. 원서를 접수하고 집에 돌아왔을때도 아버지는 내내 아무 말이 없으셨다. 얼마나 서운하시고 맥이 풀리셨을까? 철이 들어서 그때 일을 떠올리곤 할 때면… 아버지의 한참이나 처진 어깨가 눈에 선하다. “아버지, 그땐 제가 정말 죄송했어요.”


농번기의 농촌은 집지키는 누렁이의 손을 빌릴만큼 분주하다. 어느덧 집으로 향하는 경운기, 트랙터 소리가 저녁노을에 묻힐때쯤이면 쇠스랑이나 삽을 받아들고 아버지의 옆에 나란히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소소한 일상이 마냥 좋았다. 하지만 농사일을 거들때마다 농사일은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매번 투정부리는 것도 막내아들 몫이었다.


아버지는 눈이 많이 내린 날이면 마당 한켠에 눈을 치우고 볍씨를 뿌려놓고 먹을 것이 궁해진 참새들이 모여들기를 기다리셨다. 삼태기를 받쳐놓은 막대기에 새끼줄을 묶어 방안까지 늘여 놓고 한지로 바른 방문에 낸 조그마한 유리창으로 내다보시면서 경계심 많은 참새들이 방심한 틈을 노려 새끼줄을 잡아당겨서 잡은 참새로 참새구이를 해주기도 하셨다. 아버지 쉐프(chef)만의 겨울철의 별미다. 


빗자루로 자전거의 먼지를 털고 SUV 차량에 자전거를 싣고 서울로 올라왔다. 고속도로에서 운전대만 잡으면 졸음운전하는 버릇이 있어서 늘 가족들의 감시 1호 대상인데도 그날은 한번도 졸지 않고 거뜬히 올라올 만큼 나는 들떠 있었다. 아버지의 자전거가 내 차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주말에 친구와의 약속시간이 좀 남아 있어서 백화점 명품시계관에 들렀더니 한 신사분이 직원에게 한참 불평중이다. 이유인즉슨 비싸게 주고 산 명품시계가 시간이 느려져 안맞는다는 것이다. 직원은 태엽시계라서 중력때문에 느려질 수 있다고 해명한다. 그 말에 더 맘이 상한 고객은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주었다면 이 비싼 명품시계는 안샀을 거라고 말한다.


느리게 가는 것… 우리 삶의 어느 순간도 중력때문에 느려졌으면 좋겠다. 고장난 시계마냥 멈추어도 좋겠다. 사람들마다 짧은 순간이지만 평생을 두고두고 곱씹을 때마다 기분좋아지게 만드는 기억들이 있다. 마지막 기말시험이 끝나고 우연히 음대 앞에 커다란 은행나무에서 회오리바람에 하늘로 휘감아 올라가는 샛노란 은행잎들이 그랬고, 무더운 여름날 아카시아 나무 아래를 쉬이 흔들며 지나가는 향긋하고 시원한 실바람도 그랬고,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에 노곤함을 못이겨 달리는 버스 창가에 기대어 단잠에 빠져있던 순간에도 그랬다. 내내 바쁘고 쫓기던 일상속에서 이제는 멈춰서서 소중한 사람과의 소중한 시간을 기억할 수 있도록 삶이 느리게 흘러 가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은 나중에 어떤 모습으로 아빠를 기억해줄까? 우리 아빠가 쓰던 물건들이라며 간직하고 싶어 할까? 오늘 문득 궁굼해진다.


다음 주 주말이 어머니의 생신이라서 온 가족들이 어머니댁에 모이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서 이렇게 여쭤봤다. “엄마! 아버지가 차시던 손목시계! 아직 남아 있지 않아요?”


임용철
선치과의원 원장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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