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패티김!

  • 등록 2013.11.25 17:3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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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y Essay-제1887번째



“가을날 노오랗게 물들은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님께서 부르시면…”


어느 시인의 싯구처럼 노오랗게 물들은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는 10월 26일 토요일 오후 올림픽공원 내 체조경기장을 향해 아내와 같이 걷고 있었다. 치과의사인 둘째아들 영범이가 어떻게 알았는지 평소 아버지와 어머니가 좋아하던 패티김의 마지막 은퇴공연 티켓을 예매하여 효자 덕분에 관람하게 된 것이다.


그 넓은 실내체육관은 입구에서 나누어준 촛불같은 형광막대기를 들고 입장한 50~70대 나이먹은 팬들로 가득 찼고 그 열기는 감동적이었다. 평소에 음악을 좋아하고 합창활동을 해왔던 아내와 나는 큰 감동을 받았으며 우리의 젊은 시절부터 좋아하고 따라 불렀던 주옥같은 가사와 선율로 인하여 영원히 다시 올 수 없다는 우리의 젊은 날을 회상할 수 있어 즐거웠다.


난 그녀가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변치않고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자신과 팬들에게 최선을 다해 노래 부르는 모습이 항상 좋았다. 예쁘고 귀여운 여자는 아니었지만 늘씬한 키에 서늘한 눈매, 묘한 동양적인 마스크를 한 매력적인 여자였다. 특별히 노래 부를 때에 그 감성적인 섬세한 표정에서부터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한 다이나믹한 시원한 음성과 제스처는 가히 감동적이고 역동적이고 신비스럽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가난하고 암울했던 60, 70년대에 우리의 기쁨과 슬픔을, 그리고 사랑을 노래하고 위로해 주었던 주옥같은 노래들. 초우, 이별, 사랑이란 두 글자, 서울의 모정, 못 잊어, 빛과 그림자, 사랑은 영원히, 연인의 길, 구월의 노래, 가시나무 새,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가을의 연인, 서울의 찬가 등은 지금도 우리 가슴속에 아로새겨져 있다.


내가 그녀를 가까이 직접 만나본 것은 1970년 가을이라고 기억한다. 내가 군의관으로 국군 대구통합병원 치과의 보철과장으로 복무하고 있을 때였다. 국군 대구통합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군 장병 위문공연을 하기 위해 남편이신 길옥윤 씨와 같이 병원에 오셨었다.


내 기억으로 길옥윤 씨는 일본에서 태어나 ‘길옥윤’이라는 일본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국 본명은 최치정이고 서울치대 3회(1949년)졸업생으로 필자의 대선배 되시며 일본, 한국을 오가는 유명한 색소폰 연주자로서 수많은 아름다운 작사와 작곡을 남기셨으며, 아내인 패티김에게도 많은 곡을 작사, 작곡해서 부르게 하셨던 우리 팝, 가요계의 거성이셨다.


그의 동생되는 최치갑 선생(서울치대 23회)이 마침 그때 국군통합병원 보철과 레지던트로 수련 복무하던 때라 위문공연이 끝나고 패티김과 같이 치과부에 오셔서 담당 보철과장인 나에게 동생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유난히 길쭉하고 예쁜 손가락과 따뜻한 손으로 나눈 패티김과의 악수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 “잊을 수는 없을 거야”
음악을 따로 전공하고 정식 음악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는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음성, 풍부한 성량, 독특한 창법으로 매력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피나는 노력과 절제된 자기관리와 천부적인 재능으로 이루어진 성공적인 대형가수임에 틀림이 없다.


그녀는 말했다. “이 공연이 끝나면 나는 자유다! ‘I am free!’다!.” ‘쇼생크탈출’이라는 영화를 보면 시궁창 하수구를 통해 감옥을 탈출한 주인공이 비를 맞으며 우뚝 서서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I am free!”라고 외치듯이 두 팔을 벌려 “I am free!”라고 외쳤다. 55년 동안 무대에 설 때마다 두렵고 떨리는 스트레스, 공연을 앞두고 ‘목소리에 이상이 있으면 어떡하나?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가사나 음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제스처와 표정은 어떻게 해야 하나?’등의 걱정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공연 뒤 “무대화장, 무대 장치, 조명, 의상, 관객동원 등 걱정과 고심을 이제는 안 해도 된다.


체중조절 등 건강관리를 위해 못 먹었던 아이스크림, 피자, 고기를 이제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며 환하게 웃고는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가 행복해 보였다. 그녀가 자기를 위해, 자기 노래를 좋아하는 팬들을 위해 얼마나 절제하고 인내하며, 얼마나 철저한 자기관리를 해왔던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끝날 무렵, 암 투병에서 최근 회복된 여동생, 큰 딸 정아와 사위, 작은딸과 사위, 손자, 손녀를 무대 위에 한 명씩 나오게 해서 소개하며, 행복해 했다. 특히 외국사위와 딸 사이에 난 손자와 손녀가 서툰 한국말로 “축하합니다”라고 말할 때 손자들에게 키스하며 웃는 패티김에게 따뜻한 인간미를 보았다.


밝은 태양일수록, 모든 정열을 불태우며 새빨갛게 지는 노을이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자기만의 길을 걸어 아름답게 은퇴하는 그녀가 70이 넘어 은퇴를 앞둔 나에게는 부럽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녹색 자켓을 입고 온통 백발을 휘날리며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데뷔 55년의 가수생활과 75세의 성공한 인생으로서 은퇴한 그녀는 팬들을 향해 “내 사랑, 내 친구여, 내 죽어도 그대를 잊지 않으리, 평생을 사랑해도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여, 그대 내 친구여”라고 노래하곤 무대에 꿇어앉아 한참을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물짓다가 일어나 사랑하는 후배가수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눈물로 꽃다발을 받았다. 객석의 관객들도 우는 사람이 많았다. 기쁨의 눈물이요, 감동의 눈물이요, 패티와 함께 한 저들의 삶의 눈물이리라. 어린 손녀딸을 안고 손을 흔들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Thank you so much!”하며 그녀는 무대 뒤로 사라져 갔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까. 잊을 수는 없을 거야.”


당신의 아름다운 노래를 통하여 많은 위로를 받고 그동안 너무 행복했습니다. 당신의 매력적인 노래와 모습은 우리들 가슴 속에 언제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굿바이, 패티김!


김계종
 치협대의원총회 고문

김계종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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