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여행2

  • 등록 2013.12.18 11: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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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y Essay 제1892번째

무엇보다도 대마도라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은 한 가련한 여인 덕혜옹주이다. 덕혜옹주라는 한 여인을 통해 조선이라는 한 나라가 망하는 과정이 비유되기 때문이다. 1912년 폐위당한 환갑의 고종황제에게서 네 번째로 딸아이가 태어났다. 대한제국을 잃은 황제가 황궁이란 이름의 감옥에 갇혀  손녀 같은 딸의 재롱을 보며 일본에 대한 저항심과 괴로움을 달래면서 데라우찌 총독의 무례함을 견디어 낼 수 있었다.


황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담에 이준열사를 보내고, 연해주 독립군에 자금을 지원하고, 의병을 독려하고, 의친왕을 상해로 보내 독립운동에 가담시키려 했고, 또 한 가지 일본의 황가 혼혈정책을 막으려 궁내 시종의 조카와 비밀리에 옹주를 약혼시켰었다. 마약을 탄 커피를 토해버릴 정도로 명석했던 황제도 결국 옹주 7살 때 독살당해 덕혜옹주는 보호자를 잃고 말았다.


12살 때 동경여자학습원으로 강제 유학하게 된 이후 18세 때 23세의 대마도주 소 타케유키 백작과의 정략결혼으로 내선일체의 상징물로 선전되기에 이른다. 혼인 6개월 후 인사차 시댁인 대마도를 방문했다. 이때 강제 징용되어 현지에서 노역을 당하던 2000명의 한인들이 한푼씩 모아 망국의 옹주를 맞이하기 위하여 “덕혜옹주결혼봉축비”를 세웠다. 그러나 병들어 이혼당하고난 후에는 대마도인들이 무너뜨렸다. 부산-대마도항로가 개설되어 관광객이 몰려들자 볼거리를 하나 더 만들어 관광객유치를 위해 다시 세우는 얄팍한 저들의 속내를 어찌하랴.


일본문헌에서는 소 다케유키는 시인이고, 화가이고, 영문학자이고 미남으로 미화하고 덕혜옹주는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이며 결혼 후가 아니라 결혼 전부터 정신분열증이 있었다고 편협된 기술을 하고 있다. 이덕혜, 소덕혜, 양덕혜로 성을 3번 바꾸며 이혼 후 정신병원에서 비참하게 지내다 환국되어 서울대병원에서 7년간 입원치료 받고 낙선제에서 사망한 비운의 황녀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영토분쟁을 가리는 중요한 근거의 하나는 지도다. 1530년에 풍신수길의 부하가 그린 지도, 1785년 일본어 원판 임자평의 삼양접양지도와 조선팔도지도, 1788년 클라프로드 출판지도, 모두에 대마도는 조선령으로 되어있다. 그 후 대마도가 조선령으로 되어 있는 원본은 망실되었다. 왜 없어 졌을까?


1864년까지의 모든 국제공인지도에는 대마도는 조선령으로 표시되어 있고 대한해협도 대마도 아래로 표기되어 있었다. 1905년 일제 강점기에 대한해협도 대마도위로 옮겨져 지금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1868년 일본이 명치유신이후 대마도를 통한 구 막부시대의 간접통교에서 일본외무성이 조선과 직접통교로 바뀌면서 대마번을 없애고 나가사키현의 하나의 지방행정단위로 만들었다. 
일본은 대마도를 귀속시킨 1868년 이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외국과 영토교섭에 사용한 프랑스어판과 일본어 원판을 수거 폐기하고 필사본을 대량 만들어 배포한 것으로 의심 받고 있다.  그런데 없어진 원본을 변조한 필사본에는 일본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가장 일본인다운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5세기 이전까지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가야의 영토였고 1868년까지는 우리의 영향력 하에 있었으나 1870년 메이지유신으로  조선 관인이 사용금지 됐고 대신 일본도장이 사용되었다.


그 배경을 보면 막부시절 일본의 페스탈로치로 알려진 요시다 쇼인은 그의 제지들에게 천황을 영광되게 하기위하여 천황께 조공 바칠 나라를 확보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문하에서 교육을 받은 이등박문은 그 유지를 따라 우선 종의달의 대마도를 침공하여 강제로 일본에 귀속시킨 것이다. 명치유신 2년 후니까 이등박문은 29세쯤 되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시작된 정한론은 지금에 이르러 아베의 신 정한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대사는 일제강점기에 51종 20만권을 빼앗아가 고대사를 지우고  조작한 것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대마도의 최남단 쓰쓰자키에 진구황후라는 여인이 서기 200년에 신라를 정벌했다는 전설을 싣고 있다. 이즈하라에는 그를 모시는 하치만구신사가 있다. 임진란 때에도, 한일합방 때에도 이 전설을 들먹이며 자기들의 옛 땅에 다시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일까.


혐한 일인이 일본 전체에 8%라는 말이 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인지 어떤 곳에는 한국인들은 들어오지 말라는 표지가 붙은 작은 카페가 있다. 아직은 앞서 있지만 한국의 발전이 너무 빨라 뒤처질까 조급해진 일본인들의 내심과 생존법이 어우러진 칼 문화 한 면을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이 일본이 차지한 대마도의 현재다. 한번쯤 가보고 역사의 숨길도 느껴야 할 곳이지만 두 번은 갈 필요가 없는 곳이다.


일본은 역사를 조작해 영토를 지배하려 한다. 환단고기는 단군시대의 삶을 묶은 책이다. 이 속에는 BC 2200년간 지속되어 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역사와 학문, 문화가 훨씬 앞선다. 단군 사벌 때 대마도와 규슈를 정벌했었고 단군 매륵때에는 힘이 강해 주변국과 일본열도 모두 평정한 일이 있었다. 일본이 고구려 이전 역사만 지우면 일본과 비슷한 역사 연대가 이루어지므로 이토는 조선역사 말살정책을 가속화한 것이다.

 
대마도 중앙지역 풍옥정에 가면 와타즈미신사가 있다. 두 신을 모시는 해궁으로 와소만과 잘 어우러져 제법 신화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해신의 큰 딸이 낳은 아들 이소라에비스가 해신의 둘째딸인 이모와 결혼해서 난 아들이 일본 초대 신무천황이란 전설이 얽혀 있는 곳이다. 일본국가 발상지가 본토가 아니라 대마도라는 점이 이상하다.


대마도에는 청일전쟁 때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많은 포대를 설치해 왔다. 모두 13곳이나 되는데 그 가운데 상대마정 풍포대는 5년 내 걸친 공사로 완공된 지하 굴개식 포탑포대인데 부산까지도 공격이 가능하며 한국노무자들이 지은 대표적 방어포대의 하나이다. 대마도는 일본토방어의 1선으로 지금은 육해공자위대의 시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부산이 보이는 49.5km거리의 대마도, 왜 지금은 우리나라 땅이 아닌가. 요즈음 많은 한국인들이 낚시하러, 등산을 하러, 자전거 타러 대마도에 간다. 그런데 역사의식을 가지고 가는지가 궁금하다. 1948년부터 이승만대통령은 여러 번 대마도 반환을 요구해 미국과 일본이 골치 아파 하던 중 6·25발발로 소멸되고 만 것이 못내 아쉽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전후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구축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해 제지 했었다.


그간 애국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무궁화를 심고 왔었는데 일인들이 다 뽑아 버렸다고 한다. 2013년 10월 11일 필자는 제자들과 함께 대마도를 찾을 날을 기리며 태극기를 묻고 왔다. 그 날까지 썩지 않고 남아 우리 땅이라는 징표가 되길 꿈꾼다.


김영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김영수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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