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숙제로 쓰던 일기

  • 등록 2014.01.10 13:3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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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y Essay 제1898번째

누구나 공유하는 비슷한 경험이 있다. 어렸을 적 숙제로 일기를 썼던 경험. 방학이 되면 어김없이 일기는 밀리기 마련이었다. 일기는 그 시절 가장 귀찮은 일이었다. 그래서 중학교에 올라갈 즈음 다들 일기에서 손을 놓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어렸을 적 일기를 보며 재미를 느낀 적이 있었다. 그제서야 일기를 써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일기를 써보기 시작했다. ‘언젠가 다시 읽어보면 분명 재밌을거야’란 생각으로 꾸준히 일기를 썼다. 목적이 생기고 나니 일기쓰는 것이 귀찮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하루를 차곡차곡 쌓아갔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일기가 조금씩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름 오기가 있어서 지나간 날이라도 최대한 빠트리지 않으려고 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땐 그날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나 영수증,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참고했다. 하지만 나중에 일기를 훑어보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밀린 일기는 일기다운 일기가 아니었다. 밀렸던 날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만 적혀있었고 거기에는 내 생각이나 감정이, 과장 좀 보태면 영혼이 담겨있지 않았다.


사실 밀린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컴퓨터로 일기를 쓰기 시작하던 즈음이다. 컴퓨터로 쓰는 일기는 장점이 많았다. 아마도 키보드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기록 도구 중 하나일 것이다. 손으로 일기를 쓰던 때보다 같은 시간 동안 더 많은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사진을 달아놓기도 용이했고, 검색 기능도 있었다. 친구 이름을 입력하면 내가 그 친구와 언제 어디서 무얼 했는지 전부 검색되었다. 재미있기도 했고 때때론 아주 유용했다. 


하지만 컴퓨터로 쓰는 일기는 너무 빨랐다. 기록의 속도가 생각의 속도를 넘어섰다. 내 생각과 감정은 타자로 치기엔 너무 느렸다. 빠르게 이동하는 커서 저만치에 느릿느릿 따라오다가, 뭔가 보일까 싶을 즈음엔 이미 다음 문장으로 넘어갔다. 더 빨리 타자를 칠수록 일기는 재빨리 해치워야하는 업무에 가까워졌다. 뭔가 기록해야한다는 의무감만 남았다. 일기는 일지가 되어갔다. 흥미를 잃으니 귀찮아지고, 일기는 결국 다시 방학숙제가 되어버렸다.


일기를 쓰는 이유는 다양하다. 학교 숙제라서, 재미있어서, 추억을 간직하려고,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습관이라서, 글쓰기 연습을 하고 싶어서, 기록해두어야만 안심이 되는 강박증 때문에 등등. 어떤 이유던 간에, 다시 읽어보았을 때 재미있고, 나를 다시 깨닫게 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하는 그런 일기는 찬찬히 생각을 곱씹어가며 쓴 일기였다.


이제는 그것을 알고 컴퓨터로 일기를 쓸 때 내 생각에 귀 기울이려고 나름 노력을 많이 한다. 요즘에는 스마트폰도 활용하고 있는데, 생각과 감정이 떠오르는대로 기록해둘 수 있어 좋다. 감정은 떠오르는 순간 바로 기록하는 것이 제일 정확한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스마트폰 타자속도가 컴퓨터 키보드보다 오히려 느려서 좋은 점도 있다. 스마트폰으로 쓰는 일기가 또 밀린 방학숙제가 되어버리진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정말 귀찮으니까.


장현욱
연세치대 3학년

장현욱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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