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 탐사를 위해 대마도를 비롯한 하얼빈 등을 여행했다. 특별히 중국에서는 안중근의사의 행적을 더듬으며 사서하는 부자 양반집 아들의 고행을 따라하게됐다.
하얼빈역은 1909년 10월 26일 조선의 원흉이자 동양평화를 파괴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코레야 우라(대한국 만세)”를 외친 곳이다. 내가 아는 것은 교과서적 내용 이것 뿐이었다.
거사현장을 보려면 장춘에서 기차를 타야 하얼빈의 제일 플랫트폼에 도착할 수 있다.
현장에는 바닥에 저격 장소 표시로 삼각형이, 피격자의 위치에는 4각형의 표시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방문 예정지는 대련시 형무국, 관동주법원, 여순감옥, 공동묘지, 731부대 방문 등이었지만 많은 일정 가운데 이곳 방문은 이번 여행의 핵심이었다.
현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어두움이었다. 그러나 가슴은 설레이기 시작했다. 4시간의 기차여행에서 내려 긴 지하도를 지나 현장에 접근하려는 순간 중국 공안원의 강력한 제지로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로 시도를 했으나 중국 외사과의 허가 없이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이유는 최근 일본의 거센 항의로 한국인의 출입을 각별히 단속한다는 것이다. 결국 역 구내이지만 또 하나의 철책 밖에서 보이지 않는 150미터 지점을 상상하며 서서 묵념만하는 것으로 우리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10월의 장춘과 하얼빈은 추웠다. 헤이룽장 성정부가 난방을 통제해 오성급호텔 소피텔의 냉방에서 안의사의 또 다른 한 가지 고행을 추가 체험할 수 있었다. 그가 회령전투에서 일군에 패하였을 때 썩은 옷을 걸치고 허기와 추위로 사경을 헤매던 기록이 있다.
그런데 안의사는 러시아군이 철통같이 지키던 하얼빈역 방어망을 어떻게 침투할 수 있었을까. 일본이 가능한 한 많은 일본거류민들이 환영할 수 있도록 출입을 완화해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늘이 도운 것이었다.
답사 후 귀국한 이후 안의사의 유해 없는 가묘 참배, 의거 104주년 기념 관련 행사, 학술세미나 참석 등 우리나라 주변국 관련 근대사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하는 순간 일본 관방장관 스가 요시히데가 “안의사를 범죄자라고 했다”는 ‘급보’가 들려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가 요시히데의 이같은 망언은 6월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방문때 시진핑 주석에게 기념비 설치를 제의한데 대해 한국을 방문한 중국 국무위원이 흑료강성안에 기념표지석 설치가 양국 간 협의 아래 잘 진행되고 있다고 밝힌 것에 대한 반발의 표시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비록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교활한 아버지 덕택에 신분세탁하고 하급무사에서 일본 초대총리, 초대한국통감을 지내면서 일본 근대화의 영웅으로 추앙을 받았다지만 그는 죽어 마땅한 자였다. 1897년 일본은 제국주의를 선포하고 조선 만주 중국 몽골을 강제로 병합하고 식민지화하려는 침략군의 선봉장에 섰던 자다.
처음에 안의사는 일본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청일 전쟁후 우리의 스승인줄 알았다가 적이었음을 늦게 깨달았다. 남대문 앞에서 군대가 해산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일단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유럽으로 공부하러 간다고 하고 독립운동을 하러 연해주로 간 것이다.
교육자였던 안의사는 한국독립을 평화운동으로 달성하려고 했었다. 그러다 안 되니까 무장투쟁, 옥중투쟁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한국독립운동의 독보적인 존재다. 안의사도 죽으려고 한 일은 아니다. 죽음을 무릅썼을 뿐이다. 그는 체포되었을때 전쟁포로임으로 만국공범으로 처리해 달라고 했다. 전쟁포로는 국제법상으로는 사형이 없다. 안의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초기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일군 3명을 죽이지 않고 풀어준 일도 있었다.
거사후 당시에 한인들은 안중근 때문에 이제 한국은 망했다고 했다고 한다. 이토가 우리를 잘 살게 해 주었는데 배은망덕하다고 질타했다. 전국 각처에 이토 사제단도 만들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한국이 망할 이유가 많았다는 의견도 있다.
지금도 일본의 아베는 한국은 어리석은 나라라는 말을 거침없이 하고 있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일본이 더 잘 살았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우리가 더 잘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느끼고 있음에도 말이다.
일본 관방장관 스가 요시히데가 ‘안의사를 범죄자’라고 발언한 이후에도 일본 관방부장관 세코 히로시게는 또 다시 ‘안의사는 사형판결을 받은 인물’이라고 추가언급을 해 공분케 했다.
안의사의 사형판결은 일본인들이 꾸민 일로 정당한 재판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당시 고무라 일본외상은 국제법을 잘 아는 자여서 일본에 데려오지 말고 현지에서 죽이라고 지시했었다.
전 중국수상 주은래도 안의사를 숭모했고 중국은 안의사를 항일 영웅으로 인정하고 있다. 안의사는 독립운동의 첫 포문을 쏜 것이다.
이제는 표지석 설치 작업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2006년 안의사의 전신상을 건립했을때 중국은 강제 철거했고 안의사의 활동이 외부에 소개되는 것을 일본 때문에 불편해 했었다. 사실 청일전쟁이후 중국은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배경 때문에 의거현장 답사는 비록 실패했지만 이제는 중국은 일제침략의 역사를 한국과 공유하고 있고 다오위다오 분쟁으로 일본과 갈등이 일어나자 안의사 추모 사업을 위한 새로운 방향을 선택하고 있다.
높이 1.5미터정도의 석판에 의거와 관련된 한국어, 중국어 설명을 넣고 안의사가 주창한 동양평화론까지 압축적으로 포함하는 방안이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10월 현지답사를 통해 의미있는 흔적을 보고 느끼면서도 한동안 침울한 기분에서 헤어나지 못했었는데 그나마 ‘표지석 설치 파문’으로 우리나라에 다시 한 번 애국적 반응이 일어나게 돼 다소나마 그 기분이 사그러 들었다.
김영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