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붕어에게 속삭이다(상,하)

  • 등록 2014.02.07 11: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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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y Essay 제1904~5번째

-1월17일 치과의사국가고시를 마친 후배들에게

20여 년 간 여러분에게 끝없이 이어졌던 기나긴 시험들의 대미를 장식할 치과의사국가고시라는 중요한 관문을 마친 여러분과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이 길고도 지루한 시간들이었을 거라 생각되는 것은 저도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쇼생크 탈출, The Shawshank Redemption 1994’ 이란 오래된 영화가 있지요. 다들 아시다시피 ‘과연 끝이란 게 있을까?’ 싶게 끝없이 이어지는 지루한 수감생활을 그린 작품입니다. 수감자중엔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도 있고, 무죄라며 억울해하는 사람도 있으며, 이젠 어차피 아무래도 좋다는 식인 사람들도 있지만, 시종일관 불안한 색조의 어두침침한 화면과 축 늘어진 죄수복의 느릿느릿한 실루엣으로, 묘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영화였죠. 한마디로 공포와 절망이 지루함과 얼마나 긴밀하게 얽혀 서로 상승작용을 하며, 그 가운데 희망이 얼마나 반짝이는지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흥미롭게도 여기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지루함의 끝을 제각각 다르게 경험합니다. 탈옥한 사람과 만기출소한 사람의 행적이 병렬로 그려지며, 천국과도 같은 햇살이 내리쬐는 해변의 엔딩장면은 그 끝이 얼마나 충만하며 빛나는 지도 보여줍니다. 마치 오늘의 여러분 심정과도 닮은 모습을 표현하는 것처럼 말이죠. 여러분의 여정을 감옥에 빗대다니 다소 과한 비유였을지 몰라도, 누구든 힘든 학창시절을 뒤돌아볼 때 어느 정도는 공감할 얘기이리라 생각합니다만….

헌데 이 영화의 원제는 ‘The Shawshank Redemption’으로, redemption이란 ‘탈출’이라기보다는 ‘도로 사들임, 몸값을 주고 석방시킴, 속죄, 약속 따위의 이행’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감옥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보다는 오히려 사회로 다시 돌아왔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진 어휘선택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과연 이제부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주인공의 눈빛을 담은 끝 장면이 왜 그렇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던가에 대한 의문은, 제목을 곱씹어 볼 때 다시금 끄덕여집니다.

언제나 이게 문제입니다. 끝이라는 부분이 늘 다른 시작의 순간과 겹치다보니, 고단한 영혼은 쉴 틈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느끼고 있을지 모르는, 딱히 뭐라 이름붙이기 힘든 저 불편함의 정체는 아마도 분명 ‘과연 이제부턴 어떻게?’ 라는 류의 고단함일 것이라 짐작해봅니다. 저 역시 아직도 삶을 배우며 살아야하는 처지(?)이지만, 선배랍시고 며칠 밤을 낑낑대며 주섬주섬 챙긴 진솔한 메모꾸러미이니 오늘 이 지면을 빌어, 왠지 예전의 바로 저 같은 눈빛을 가진 여러분들에게 마음속 생각들을 전하려합니다.

또 영화 얘기입니다.

얼마 전 ‘about time’이란 영화를 봤는데, 보는 내내 스페인의 화가 Salvador Dali의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이란 징그러운(?) 그림이 생각났습니다. 영화에선 시간의 왜곡을 묘사, 아니 어쩌면 간절히 소망하는 정서가 느껴졌는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표현한 거라고까지 평가를 받는다는 Dali의 그 일그러진 시계그림들 역시 시간을 초월하고자하는 화가의 열망을 그렸다고 얘기들 합니다. ‘강렬한 소망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오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인간의 간절함은 그 기원이 아주 오래된 것 같습니다. 영생을 염원하는 파라오의 피라미드도 그렇고, 거의 모든 종교들도 영원을 약속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그 간절한 저 강렬한 염원의 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아마도 ‘후회’가 아닐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저러한 아쉬움이 밀려오는 인생의 말년이 오면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훨씬 잘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회한에 잠기게 되고, 그런 사람들에게 종교는 위로와 대안으로 다가서나 봅니다. 이런 말투로 말이지요… ‘과거로 돌아갈 순 없지만, 미래의 저 끝자락 뒤에 무언가가 계속되거나, 또는 시작될 테니 힘을 내라’고… 애석하고 가엾게도 우린 그 위로를 거절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위로를 받아들이고 믿는다면, 결국 지금 우리의 삶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그 무엇들의 끝의 계속인 셈이고, 심지어 이 힘겨운 현재가 이른바 전생의 내가 간절히 바라던 - 쇼생크를 탈출하기 전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이 꿈꾸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감당키 어려운 상념을 눈앞에 두고 보아야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종교의 단도직입적인 위로 - ‘앞으로 올 영생을 믿으라’는 - 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와 철학자들은 과거로의 끌림을 외면하지 말라고 속삭입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이지 많은 이들이 남은 이들에게 고별사를 남기고 삶 저 너머로 사라져갔습니다. 사랑하는 몇몇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당부도 하고 혼잣말도 하며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말입니다.

만일 그 수없는 당부나 혼잣말들에서 어떤 일관성이나 일맥상통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점들을 염두에 두고 살아본다는 건 어쩌면 중요하고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그래서 오늘 이 순간이 과거가 되어버리는 그 날이 왔을 때 아쉬움과 후회가 조금이나마 줄어들 수 있다면, 우리들이 경험하는 안타까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림과 영화얘기는 그만하고 詩 하나를 옮겨 적어봅니다.

어머니 저는 금붕어들이 미쳤으면 합니다.
날치처럼 어항에서 튀어나와 일제히
양자강 넓은 하류에 흐르는 강물로
노자가 말한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로
어머니 저는 금붕어들이 지느러미를 세우고
하늘을 날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 저는 금붕어들이 미쳤으면 합니다.
옛날 낚시 바늘에 걸려 팔딱거리던
붕어였으면 합니다.
그물을 찢고 강으로 되돌아가는 힘센 붕어였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 금붕어에 밥을 주다가 이 녀석들이 이빨로
내 손가락을 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큰 눈이 하늘을 향해 있는 것을 보면
어느 날 몰래 어항을 깨고 용처럼 승천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런 날이 오면 저는 어머니
모른 척하고 문을 열 것입니다.
넌 빨래를 거두라고 아내에게 이를 것입니다.
금붕어들의 자유로운 비상을 위하여
나의 비상을 위하여
                                   ‘미친 금붕어’   -이어령

어째서 이 시대의 지성으로 그토록 고상한 삶을 꾸려오신 분이 낯설기까지 한 묘사-미친 금붕어라니-를 통해 뒤따르는 이들에게 어항을 깨고 튀어 나오라는 ‘선동’의 메시지를 전하고 계시는 걸까요?  젊은 날 힘써 소위 지성과 교양을 쌓아 갖춘다면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어 추구해 마지않았던 그런 나날을 보내셨을 분이 아쉬워 하셨던 것이란 과연 뭘까요? 이어령 선생께서 이 당황스런 말씀을 꺼내시기 150여 년 전, 저쪽 다른 대륙에서 니체가 이런 식으로 대답을 먼저 해 두었지 싶습니다.
“주거를 제공하고, 오락을 제공하고, 음식과 영양을 제공하고, 건강을 주었음에도 사람은 여전히 불행과 불만을 느낀다. 왜일까? 사람은 압도적인 무언가를 원하는 것이다…”

여기서 압도적인 무언가란 대체 뭘까요?

보통사람들을 압도하는 엄청나고 굉장한 일들을 인간은 종종 해 댑니다.

이를테면 예전에 비해 월등한 스피드와 회전성에 안전성까지 갖춰가는 스키장비라든가… 페이스북처럼 예전부터 비슷한 게 있었고, 누구라도 만들 수 있었을 거라고 여겨지긴하지만, 막상 나타나고 보니 실제로 어마어마한 기세로 퍼져나가는 네트워킹의 위력 등을 예로 들어 볼 수 있겠네요. 그런 일들을 이루어내던 그들 곁의 많은 이들이 약간씩은 비웃기도하고 어느 정도씩은 말려도 보고 했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그런 거 없어도 세상은 잘 굴러간다고들 했겠죠. 네가 굳이 안 해도 되니까 한 눈팔지 말고 부지런히 네 갈길 가라고 충고했겠지만, 그들은 결국 홀린 듯 그 무언가에 매달렸던 거겠죠. 그들에게만 보이던 그 심하게 눈부신 압도의 빛이 이끄는 대로 ‘헤매는’ 모습은 애초의 ‘제 갈 길’에서 멀어져 가는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들은 그들의 길을 새로이 낸 셈이 된 겁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일찌감치 말했습니다.

“모든 좋은 것은 멀리 돌아가는 길을 통해 목적에 다다른다” 라고.

우리의 쇼트트랙 선수들도 늘 그렇게 트랙을 크게 돌아 길을 열어 환희의 금메달을 따곤하죠. 압도적인 스피드로 말입니다.

이어령 선생의 미친 금붕어를 읽을 때도 손가락을 물리고 싶다는 선생의 말씀에서 압도적인 힘이 느껴집니다. 그는 어쩌면 금붕어들이 혹시라도 어항 밖으로 뛰쳐나올까 늘 걱정하며 사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맘속으론 그러고 싶지 않았고, 혹시 뛰쳐나오는 정신 나간 금붕어가 있으면, 기꺼이 손가락을 물렸을 거란 고백인 겁니다. 정말 따스한 맘으로 금붕어에게 정말로 필요한 용기라는 소중한 먹이를 주는 정말 힘센 분이죠.

만일 어떤 금붕어가 형형한 눈빛으로 龍처럼 승천하려는 음모를 꾸민다면 기꺼이 손가락을 물려가며 모른 척 어항뚜껑을 열어 줄 수 있을까요. 오늘 여러분 옆의 선배들은 그런 마음으로 여러분과 얘기를 나눌 것입니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닌 용기에 대한 얘기를 전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혜와 인내와 성실은 이미 충분하였습니다. 쉬운 감옥탈출을, 중력을 덜어주는 어항 속 표류의 카드를 집어들기 쉬운 이 시절을 환기시키고 어항뚜껑을 열어드릴 것입니다.

…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 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며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라고 솔로몬이 당부합니다.

선배들과 함께하는 오늘 저녁이 오래도록 기억되시길…
보람있고 따스함이 가득한 나날들로 행복하시길…

※ 윗 글은 필자의 모교졸업생환영 만찬행사인 “DCOSNU 2014”의 행사브러셔 섹션, ‘멘토의 편지’에 게재한 내용을 중략과 축약으로 다듬은 내용입니다. 같은 시험을 치른 2014년 치과대학졸업생인, 모든 예비치과의사분들의 건승을 기원드립니다.


김용호
김용호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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