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활의 추억

  • 등록 2014.02.14 16: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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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y Essay-제1907번째

나는 치과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다른 대학을 다녔다. 1학년 때부터 3학년 겨울 방학 때 휴학을 하기 직전까지, 나는 모든 과 행사에 참석하였다. 대학 축제 때 주막에서 전 굽느라 밤도 새고 엠티란 엠티는 다 따라가서 평소 집에서 설거지도 안 해본 애가 갑자기 김치찌개도 끓이고….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농촌 활동’. 기간이 길어서 일까, 몸이 힘들어서 일지는 모르지만 농활은 가장 신선한 기억이다. 농활은 보통 해가 가장 뜨거운 8월에 간다. 1, 2학년 합해서 열댓명 즈음이 경북의 한 마을에 도착하여 각각 경운기에 나누어 타고 마을 회관으로 모였다. 마을 회관에 도착하니 선발대로 와 있던 영호와 세회 선배가 수염도 안 깍고 한 다리만 걷어 올린 추리닝 차림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우리는 산적이라면서 영호를 놀렸지만 열흘 뒤 집에 돌아가서 찍은 사진을 보니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마을 회관은 마을의 한 가운데 있는 1층짜리 건물로 커다란 방과 바깥으로 뻥 뚫려 있는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고 앞마당이 있었다. 방에서 문을 열고 앞마당을 쳐다 보면 건너편에 1칸짜리 푸세식 화장실이 있었는데 문이 없고 커다란 종이박스가 문을 대신하고 있어서 바지를 벗은 채 일어서면 안되었다. 부엌에서 흙 묻은 발을 씻고 간단히 등물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샤워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회장선배는 여자는 2일, 남자는 3일에 한 번만 샤워를 허락하였다.(마을 어른 집에 가서 하는 걸로)

농촌 생활의 일과는 아침에 각 배정된 집으로 가서 일감을 받아 도와 드리고 저녁에는 마을 회관으로 모여 일과 보고를 하고 밤에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나의 첫 일은 논에서 피뽑기였다. 장화 신은 발은 푹푹 빠지고 피는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었다. 토시를 꼈는데도 팔뚝은 뜨겁고 손수건으로 둘러싼 목과 얼굴도 벌개졌다. 새참은 된장찌개였는데 댁에서 먹은 점심보다도 논에서 먹은 새참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아침, 새참, 점심, 새참, 저녁 하루에 5끼를 먹었다.

저녁에는 우리끼리 얘기도 하고 밥을 해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이 후 마을 아이들이랑 주로 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방에서 무서운 이야기를 하고 놀았는데 아이들이 무서워 할까봐 하나하나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는 가로등 없는 길에 무덤까지 나오니 우리끼리 더 무서워서 마을 회관까지 마구 뛰어갔다.

마지막 날은 정말로 참을 수가 없어서 마을회관 화장실을 이용하였다. 요즘도 젊은 학생들이 농활을 갈 텐데 어떨 지 모르겠다. 아마도 마을 회관은 훨씬 좋아지지 않았을까. 그래도 나는 화장실 없고 샤워실도 없어서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친구들과 생활한 게 참 재미있었던 것 같다.

병원이 양산으로 이사를 왔다. 이 동네도 논밭 가꾸는 농촌까지는 아니지만 처음엔 편의점이 없어서 밤에 물을 못 마시고 참고 잤던 기억이 난다. 그 후 4년 동안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서 여기도 이제는 왠만한 건 다 있지만 밤에 퇴근을 할 때마다 넓은 풀밭과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면 농활할 때가 떠오른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이 맘 때 개구리의 개굴개굴 울음 소리를 들으면 땀 흘리던 여름 밤이 떠오르며 기분이 참 좋아진다.

김소연
부산대치과병원 보철과 전공의

김소연 전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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