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서 시작한 장애 아동 치과 진료가 전주로 치과를 이전 하면서 본격적으로 장애학교인 은화학교를 도맡아 봉사 한지 벌써 15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 귀여운 꼬맹이 손님이 치과에 왔을 때 여느 아이들과는 다른 행동을 보이며 진료를 힘들게 했지만 치료를 해 갈수록 느껴지는 의무감이 봉사의 첫 단추였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사설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 아동의 모임을 알게 됐고 그 아이들을 위해 군산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건치) 회원 모두가 돌아가며 점심시간을 봉사의 시간으로 무료 장애 아동 치과 진료를 시작 했었습니다.이후 전주로 치과를 이전한 저는 이곳 전주에서도 특정 학교를 정해 봉사하기로 계획을 하였고 이미 자림원 봉사 활동을 하는 전주 건치에 합류 할까 하다가 일요일 진료 시간이 맞지 않아 주중에 봉사할 수 있는 곳을 찾던 중 전주시 보건소 구강보건팀이 장애 아동 진료를 구상 중임을 알게 됐고 팀장이 예전 공보의 시절 같이 근무했던 치과위생사인 기막힌 인연으로 함께 은화학교를 선정하여 봉사를 시작 했습니다.
유치부에서 고등학교까지 약 300명의 학생들을 검진하고 치료하고…. 그런 시간이 벌써 15년을 넘다 보니 이젠 아이들도 학교의 선생님으로 밝게 인사할 정도가 되었네요.
심한 중증의 복합 장애 아동이 많은 학교이다 보니 처음 구강검진을 하였을 때는 검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아이들을 검진하고 치료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장애아동의 특성상 체어에 눕혀 스트립으로 고정시켜 진료를 하게 되는데 저항이 너무 심하여 진료보다 눕히는데 힘도 시간도 더 많이 소요되고 스트립을 2개나 했는데도 진료도중 갑작스런 아이의 저항으로 2~3명의 공익 요원이 항상 머리와 몸을 잡아 고정 시켜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합니다.(진정법도 이들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럴 장비도 없어서 )
진료도중 토하거나 침을 뱉거나 하는 과정이 늘 반복 되다보니 이제는 일상이 되었고 심지어 물리거나 (개구기가 빠져서) 머리채를 잡히거나 등등 참으로 상상 하기 힘든 진료의 모습이 장애아동 구강보건실의 풍경입니다.
300명의 아이들을 제한된 시간에 진료를 마쳐야 되기 때문에 (모든 아이를 1번 이라도 진료하는데 보통 2~3년 정도 걸리는 관계로) 일단 체어에 앉히면 모든 충치는 레진으로 치료하는 걸 원칙으로 하고 유치 발치 등 가능한 모든 치과 치료를 완료함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 오전시간을 이렇게 진을 빼고 오후에 치과진료를 하다 보니 육체적으로 매우 피곤하지만 아이들과의 만남은 또 다른 영적인 위로와 감사를 저한데 줍니다. 작은 힘이지만 나의 달란트로 치과에 오기 힘든 아이들에게 베풀 수 있다는 마음과 그래도 세상은 살만 하다는 걸 보여 주시는 학부모님들, 그리고 함께 이렇게 선한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돕는 전주시 구강보건실 치위생사들, 이 모든 일들이 나에게 새 힘을 줍니다.
생각지도 못하는 많은 어려움이 시시 때대로 돌출 되지만 혹여 봉사를 처음 생각하는 선생님들에게 나의 모습이 디딤돌이 아닌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심에 더욱 더 용기를 내고 힘을 내어 아이들을 찾아 갑니다.
또 다른 모습으로 숨어 봉사하시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가끔씩 듣노라면 홀로가 아니라는 생각에 더욱 힘이 납니다. 치과 진료의 특성상 개인 병원에서 장애우를 치료하는 것이 힘들어 이들이 치과 진료를 받을 만한 병원이 적고 또한 많은 장애인 학교에서 치과진료를 원하는 현실이다보니 봉사의 마음으로 참여하는 치과 선생님의 손길이 매우 절실한 현실입니다.
그래도 요즘 장애우 봉사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물어 오시는 동료 치과 선생님들이 가끔 생긴 걸 보면 내년에는 더 큰 희망을 품게 합니다.
이런 작은 봉사의 시간 이 좀 더 큰 밑그림으로 저를 이끌었는데 그건 바로 해외 빈민 치과봉사 진료의 기회였습니다. 나눔을 통한 사랑의 빚 갚기에 더 많은 동역 치과 의사들을 기대하며 오늘도 장비를 챙겨 봅니다.
네메스테!
우연한 기회에 ‘비전 아시아 미션 의료 선교회’에 가입하여 그들과 함께 난생 처음 인도라는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축복의 인사입니다.
인도에는 ‘카스트라’라는 독특한 4가지 계급제도가 존재하는 데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입니다.
이 4계급 이외에 1억명 정도인 불가촉 천민(달릿)이라는 최하층 계급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접촉하는 것조차 금하는 천한 계급입니다. 함께 공동으로 쓰는 우물도 쓰지 못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제한 받는 사람들.
내과, 정형외과, 피부과, 안과, 소아과, 치과, 한의과 등 거의 전과에 걸친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약사, 의과 대학생 및 다른 봉사자들과 이런 달릿을 위한 의료 선교를 여름 방학 휴가를 포함하여 9일 일정으로 다녀왔습니다.
남인도 카다파를 중심으로 매일 10시간 이상의 버스이동을 통해 오지에 있는 달릿을 만나 진료를 해주었습니다. 이동식 치과장비로 스케일링과 레진 충전 치료, 발치 등의 진료가 이뤄졌습니다.
평생 의사라는 사람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죽는 그들에게는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 의사 일지 모르는 상황 이다보니 신발이 없어 맨발로 불원천리 달려와 몇 시간 줄을 서서 진료 받는 그들을 어떻게 소홀하게 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봉사 차 나와 있는 현지 간호대학 학생들을 통해 짧은 대화로 문진하고 바디 랭귀지로 안심시키며 진료하다 보면 깜깜한 저녁이 되고, 전기사용이 용이 하지 못해 진료를 마치려 밖을 보면 아직도 기다리는 줄은 끝이 없고, 아마 예전에 우리나라도 이런 시절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비록 짧은 시간에 치료를 전부 완성시켜주지 못하고 또 계속적인 관리를 못해주는 형편에서 이게 무슨 의미일까 회의가 들기도 했지만 진료를 기다리는 그들의 눈망울을 보노라면 지금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우리나라도 힘든 사람이 많은데 멀리 가서까지 그렇게 해야 하냐고?
우리 주위만 급하다고 의료에서 절대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모두 나중으로 미룬다면 언제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우리의 선조들이 예전에 먼저 혜택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이제는 우리도 그들을 돕는 작은 행동을 보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함께 해외의료 봉사를 동참했던 여러 선생님들과 준비하는 가운데 많은 도전과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마음만큼이나 얼마나 자신의 삶속에서 나누는 모습을 보여 주든지……. 어떤 선생님은 아내와 상의해서 오랜 기간 부어오던 주택부금을 해약하여 봉사의 자금으로 내놓았습니다. 이런 선한 자극이 나에게도 많은 용기를 주었습니다.
지난 겨울에 다녀온 네팔 의료 선교에서 만났던 히말라야 고원의 티벳 난민의 얼굴이 갑자기 떠오릅니다. 아픈 치아 전부를 빼달라고 산을 넘어 이틀을 찾아온 (발치해야 할 치아가 너무 많아 일부 치아를 발치하고 다음에 빼주겠다고 했는데 다음 날 다른 지역의 봉사처까지 그 먼 길을 걸어와 나머지도 발치해 달라고) 아저씨, 발치를 다 마치고 한아름 약을 들고 “네메스테!” 인사하는 진심담긴 따뜻한 눈동자가 떠오릅니다.
나의 달란트로 인해 이렇게 행복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감사한 마음이 치과의사 하기 참 잘한 것 같습니다.
나눔을 통한 사랑의 빚 갚기에 더 많은 동역 치과의사들을 기대하며 오늘도 장비를 챙겨 봅니다.
이화준 전주 고은이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