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석 바닥에 흥건한 피, 그 옆으로 확대되어 나타나는 누워있는 시체, 그리고 나타나는 우리의 해결사, CSI, 형사들, 탐정들….
오전 진료를 끝내고 점심시간, 나는 미국 드라마(일명 ‘미드’)에 빠져 사건, 사고, 검시 장면 등 밥맛 돋우는(?)화면들을 아무렇지 않게 보며 맛있게 점심을 먹는다.
어려서부터 코난 도일의 셜록홈즈 시리즈에 빠져 추리탐정 소설의 길로 접어들어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다 보고 기괴한 애드거 앨런 포의 소설까지 읽으면서 웬만한 자극에는 무뎌지기도 했으나 사이코 패스들을 처리하는 절제되고 훈련된 살인범이 주인공인 드라마 ‘덱스터’, 양들의 침묵 프리퀄에 해당하는 한니발 렉터 박사와 FBI 프로파일러 윌과의 심리 전쟁을 그린 드라마 ‘한니발’ 등은 잔인함과 그 자극도가 밥맛 돋우는 수준을 가끔 넘어서곤 한다.
왜 이런 추리물을 소중한 점심시간에 보고 앉아있는 건지 나 스스로도 궁금할 때가 있다. 개원하고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초기에는 진료의 어려움 자체에서 오는 스트레스보다도 사람들 자체를 상대하면서 오는 피로감에 더 머리 아프곤 했다. 가끔 독특한 사람들을 상대한 경우 내가 치과의사로 뿐만 아니라 정신과 의사로서의 내공이 필요한 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스트레스를 범인을 추리해보거나 주인공의 액션에서 오는 쾌감을 주는 범죄 수사, 액션스릴러물을 즐겨봄으로써 잠시 잊어버리는 시간, 그 시간이 바로 즐거운 점심시간이 된 것이다.
이쯤 되면 그러한 자극적인 것들을 너무 접한 내 심리 상태가 걱정이 되기도 하겠지만 졸업하고 개원해 살아온 15년이란 시간의 세례 덕에 지금은 치과의사로서의 내공도 조금은 생겨 힘든 진료와 사람을 상대하면서 오는 그 스트레스들이 내 자신에게 독이 되어 쌓이는 걸 피하는 방어기제가 굳건히 잘 작용하는 중이기도 하니….
하도 많은 범죄수사물과 추리 연재물을 접하다보니 이젠 사건만 딱 봐도 범인과 사고원인 경위까지도 어느 정도 파악이 되어 점점 재미와 흥미가 수그러들기도 한다. 스트레스 해소용 그 단계를 넘어 이성적인 논리력과 말발을 조금 더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접하면 좋은 드라마들도 있다.
쿨한 인간관계는 기본이요, 논리 확실한 이성적인 사람들, 잘못하면 한발 물러서 옆으로 타협할 줄도 아는 완벽한 시나리오가 있는 드라마도 있다. 법정드라마라고 한정 짓기엔 아까운 ‘굿 와이프’. 독특한 인간군상들을 대면해도 그것을 역이용할 줄 알고 잘못한 것들도 쿨하게 인정하면서 사는 데 도움이 되는 새로운 가치관을 얻게 되고… 변호사들이 정말 영리한 사람들이란 걸 인정하게 만드는 이 신선한 드라마는 친구들에게 많이 추천하였다.
한낱 드라마 시청일 뿐이지만 사람이 오욕칠정의 감정을 어떻게 조절해가야 하는지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인생관을 조금이나마 다져갈 수 있는 간접경험으로서, 진료에만 대부분의 시간이 묶여있는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건 인정한다.
머리를 더 복잡하게 씀으로써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일부 해결하는 반면 육체적인 자학(!)으로 운동노동의 강도를 높여 반대로 머릿속을 비워버리는 방법도 내 스트레스 해소법 중 하나다. 새벽 6시 체육관에 출근해 매일 런닝의 거리를 늘려가며 열심히 뛰기도 한다.
직업병으로 만성적인 목, 어깨 결림에 시달려 시작한 운동이 이제 쾌감을 주기까지 한다. 근력 운동과 런닝의 반복으로 아픈 게 나아진 건 물론 감량 다이어트까지 절로 되었다. 10분 마의 런닝 고비를 넘기고 나면 머릿속이 환해지는 순간이 온다. 다리가 절로 달려지는 그 속도에 따라 내 복잡한 머릿속이 유연히 정리되어가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힘들거나 해결할 일, 우울해지는 일들을 대하는 나만의 방식을 두서없이 끄적여 보았다. 물론 또, 친구들과 즐기는 음주와 수다도 빼놓을 순 없다. 하지만 그나마 하고나면 헛헛해지는 게 아닌 해소되어 나아지는 이 두 가지는 당분간 쉬지 않고 지속되어질 듯하다.
김현진 현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