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연구실을 정리하다 옛날 그것도 아주 오래된 대학시절 수첩을 발견했다.
여자들의 청소가 그렇듯 한 가지 관심거리를 만나면 다른 일들을 옆으로 밀어 두고 그 일에 몰두 한다. 그래서 어떨 때는 청소가 하루 종일 걸리기도 한다.
수첩하나가 35년 전 커트 머리에 운동화를 신고 뛰어다니던 청바지 소녀의 일상 속 여행으로 인도하였다. 수첩에는 주말 진료봉사, 책읽기, 과제물 그리고 다방에서 어느 누구를 기다리며 디제이 옵~~~빠가 읽어 주던 글귀…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이 꽤나 상세히 그리고 깨알처럼 적혀 있었다. 혼자 픽하고 웃어 본다. 어떤 일들은 아직도 기억에 있고, 어떤 글귀는 오글거리기 까지 한다.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고 속성으로 남아 있는 것은 새해가 되면 수첩을 준비하고 새해에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적었다. 그리고 지난해 수첩에서 꼭 기억해야 할 날들을 옮겨 적고 그리고 지난 수첩은 보관하기를 반복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해야 한해를 시작하는 기분이 든다.
수첩에 한해 계획을 세우는 것뿐만 아니라 첫날이나 처음에 의미를 두는 이런 습관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책을 사도 머리글과 서평을 읽어야 본문으로 들어 갈수 있다.
머리글은 책을 쓴 작가의 의도와 단어 하나가 가지는 여러 의미들 중 이 책에서는 어떤 관점으로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이 제시되기 때문에 책을 이해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대화에서도 그렇다. 서두 없이 상대가 준비도 되기 전에 본론으로 훅 ~~~ 들어가는 대화법을 좋아 하지 않으며, 강의에서도 도입 부분을 중요시 한다. 도입은 마음가짐이다. 이걸 내가 왜 해야 하고 어떤 이유에서 시작하는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일을 전개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이다.
건강을 정의할 때 신체적, 정신적은 물론 사회적 역할까지 잘 수행했을 때 건강하다고 한다. 나의 사회적 역할은 엄마, 아내, 교수(선생), 치과위생사 그리고 시민으로서의 역할이다, 올 한해 난 무엇을 준비하고 있고 건강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있나 생각해 본다.
엄마와 아내의 역할은 가족들의 동의(더 이상 나아지지 않는다는 체념 속에 굳어진 반 강제적 동의)하에 건강하다고 전제해 놓고, 교수로 좀 더 좋은 선생이 되는 계획을 세워 보았다. 좋은 선생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난 따뜻한 선생을 좋은 선생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치과위생사… 아마도 이건 시민의 역할과 연계지어질 것 같다. 치과위생사라는 면허를 가진 사람으로써 나보다 우리로 살기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한다. 아마 이건 나 뿐만 아니라 면허를 가졌거나 전문가로 사는 많은 사람들이 하는 고민이 아닐까 싶다. 입으로 글로만 국민구강건강을 걱정하지 말고 우리들이 국민구강건강을 위해 무엇을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한해가 되길 소망해 본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참 현실적이지 않고 이상적이라고 이야기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 정말 많다.
최근 금연교육도 우리에게 그런 기회를 제공해 준다. 비록 9000원에 불과한 금연 교육일지라도 치과에서 교육 받으면 성의 있고 다른 의료기관과는 다르다는 평가는 치과계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 이어질 것이고 그런 시각은 다른 것에도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다. 옛 말에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있듯이 작은 실천의 노력들이 큰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 기대해 본다.
이런 저런 힘찬 시작에도 불구하고 그래 새날은 역시 음력으로 시작하는거야 하면서 1월 1일 계획을 현재로 미루는 것을 보니 시작 준비가 부족한가 보다.
다음달부터, 월요일부터라고 미루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내가 서 있는 이날이 그리고 이시간이 항상 시작의 가장 좋은 날이고 시간이란 것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 백번의 계획보다 중요하다.
내게 주어진 시간들의 주인이 나임을 알고 계획들을 실천할 때 올 한해 마지막 수첩을 기록하면서 미소 짖지 않을까….
황윤숙 한양여자대학교 치위생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