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6일 한국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 선생님의 유일한 혈육인 손자 함각(咸珏)씨와 좌담회를 가졌다. 1936년생으로 80세가 되었으나 체구도 크시고 정정한 편이었다. 만나고 싶었던 분 중의 한분으로 함석태(咸錫泰)선생님에 관한 몇 가지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다음은 함각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첫째 삼각동 1번지 함석태 치과의원 건물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 함각 증언에 의하면 건물은 2층 목조건물로 지하실이 있었다. 건물입구에 진료실이 있었고 그 안쪽에 살림집이 있었다. 1951년 1. 4후퇴 이후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다 그 이듬해쯤 형 함완 가족과 서울에 와보니 할아버지가 계시라라 믿었던 할아버지 치과의원 자리에 삼각동 동사무소가 들어서 있었다. 간판까지 붙어있었다고 회고했다. 할아버지 집이라고 권리를 주장하니 말도 못 꺼내게 하면서 “빨갱이”집인데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고 거절당했다. 그때 당시 이북으로 월북한 사람은 “빨갱이”라 취급했고 개인이나 국가에서 건물을 몰수하거나 차지했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고심 끝에 형 玩(함석태 맏손자)이 기억을 더듬어 본인이 남산에서 결혼식 때도 뵈었고 치과에서 할아버지와 바둑도 뒀던 지인을 생각해 찾아뵙게 되었다. 바로 그 분이 당시 국무총리였던 장택상(張澤相)이였다. 어렵게 몇번에 걸쳐 청해 면담했다고 한다. 참고로 함석태와 장택상과의 관계를 말씀드리면 1930년대 초반 장택상의 집에서 만난 “장택상 사랑방”모임은 당대 최고의 고미술품수장가와 호사가들의 주요 모임이었고 아무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함석태는 당시 이모임에 참여하며 장택상과 두터운 친분을 가졌다.
장택상의 도움으로 그 집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후 뇌를 다쳤던 큰 형님 玩이 생활고로 그 집을 팔고 익선동에 새 집을 사 이사했다고 회고했다.
둘째 함석태 선생님의 해방 전후의 행방에 관한 것이다.
함석태는 해방 전 총독부 소개령에 의해 아끼던 고미술 소장품을 싣고 고향 평북 영변으로 피난했다. 3대차분이였다고 한다. 함각 회고에 의하면 그때 나이는 9살이었는데 할아버지가 서울에서 영변에 오셨는데 짐을 갖고 오셨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짐도 풀지 않은 채 계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사실 집은 본인 아버지 咸哲勳(함석태 맏아들)씨가 미리 마련한 집이라고 했다. 본인이 살던 영변집과는 약간 떨어진 청천강 건너 기차역이 있는 평남 구장이라는 곳이었다고 한다. 영변과는 강 하나를 사이로 서울 강남과 강북과 같은 정도의 가까운 거리라고 했다.
당시 함각 씨는 아버지 咸哲勳(함석태 큰아들) 어머니 김숙종, 큰형(咸玩), 둘째형(咸珣) 그리고 조카 함영숙과 함께 영변에서 살았었다고 한다. 큰형 玩은 영변농업학교를 졸업했고 둘째형 珣은 신의주 동중을 다녔다고 한다. 함각 씨는 할아버지 (함석태)는 구장에서 사시면서 짐도 풀지 않으셨다고 기억한다. 그후 1년쯤 지나 큰형 玩의 전언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서울로 월남키 위해 짐을 싣고 해주로 가셨다고 몇 번에 걸쳐 얘기했다고 한다. 해방 후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대지주 숙청이 시작되었는데 함석태 선생님도 여의치 않아 해주를 통해 월남코자 하신 듯하다. 맏손자 玩에게 황해도 해주에 들려 월남하겠으니 뒤따라 올 것을 부탁하고 이후의 행방은 알 수 없다. 해주를 통해 월남 루트를 택한 것은 배에 가족과 고미술품을 함께 싣고 월남하려는 것으로 추정된다.
할아버지가 서울에 꼭 계시리라 믿었으나 계시지 않았던 그 후 행방은 본인들은 알 길이 없다고 했다.
2006년 김대중 정권시절 “북녘문화재” 전시품 중 국보인 금강산연적과 몇 개의 국보는 모두 함석태 소장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미루어 소장품을 뺏긴 것은 확실하다.
셋째 함석태 선생의 유일한 사진을 찾은 경유이다.
1985년 함각 씨는 지인 제약회사 사장의 주선으로 치과임상 신종호 선생과 만나게 되었다.
함석태 선생님 사진을 구해 달라는 간곡한 요청 끝에 출처를 찾기 시작했다. 본인은 혈혈단신으로 내려와 아무것도 없었다. 강우규 의사 손녀 강영재를 데려다 기르셨다는 점에 착안하여 찾기 시작했다. 강우규 의사 독립운동 연금 수령자를 추적한 결과 채수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분은 강영재의 아들로 목사 신분이었다. 만나기 2개월 전에 강영재(강우규 손녀)는 돌아가셨고 돌아가시기 전 함석태 친척이 찾아올 것이다는 얘기를 남겼다고 한다. 진짜 손자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신분증과 사진의 인물을 알아맞히는가를 테스트한 후 넘겨받게 되었고 현재 소장하고 계신다고 증언했다.
넷째 함각과 형 함완의 월남 경위를 밝혔다.
해방되고 나서 공산당들이 집권하면서 이북에는 숙청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대지주들의 숙청이었다.
당시 영변에서 대지주였던 함석태 일가는 숙청대상 1호였고 땅을 뺏기고 이주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함경도 지방에 대토를 주겠다고 해 그쪽에 갔던 함완(함석태 맏손자)씨는 그곳 마을 사람들에게 죽을 정도로 두들겨 맞고 생명만 부지한 채 영변으로와 한의원에서 치료 후 겨우 생명만 구할 수 있었다. 그 후유증으로 뇌를 다쳐 평생 고생했다. 정신이 오락가락 했다고 한다.
월남 후 서울에 와 서울대병원에서 뇌수술 후 돌아가셨다고 한다. 압박과 감시가 심해 형 함완과 형수, 조카 함영숙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외가인 평남순천으로 피난했고 여의치 않아 철원에 할아버지 지인(함석태 친구)집으로 갔으나 그곳에서도 내부 서원의 감시가 심해 그곳 사람들조차 피해 입을까 싶어 오래 있지 못하고 다시 원산으로가 1950년 12월 원산 철수 시 배를 타고 부산으로 피난 오게 되었다. 파란만장한 피난살이였다.
다섯째 지금 교보빌딩 옆 광화문 네거리 모퉁이에 비각이 있는데 태극문양이 있는 철문이 함석태 치과의원 지하에 묻혀있던 것과 똑같은 모양이라고 증언했다. 자기도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했다. 그 비각은 서울도로의 기점이다. 중요 문화재이다. 그 비각은 원명칭이 大韓帝國 大皇帝 寶齡望六旬四十年 稱慶碑閣이다.
이 비는 대한제국의 대황제를 고종황제의 나이가 육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왕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는 경사를 위해 세운 비인데 이태준의 표현에 따르면 길을 넓히느라 뜯어 경매할 때 함석태가 낙찰 받은 것으로 “진고개부호”가 거액으로 탐내왔으나 굳게 보관해 온 것이다.
아마 소개령 때 영변으로 갈 때 부피가 커서 갖고 가지 못하고 지하실에 묻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마 맏손자 玩이 국가에 기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철문은 에피소드가 많은 유명한 철문이다.
좌담회를 통해 많은 것이 밝혀졌지만 궁금한 것이 아직도 있다. 함석태 일가의 몰락은 우리나라 역사의 한편을 보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한편의 드라마 같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변영남 치협 협회사편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