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번뇌와 망상으로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번뇌와 망상이라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무엇인지를 알아야 그것을 해결할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니까요.
여러 가지로 많이 얘기되어 있지만 좀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한 번 들어서 쉽게 와 닿아 마음 끝이 시원해지는 답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번뇌는 욕심으로부터 시작하고, 망상은 불안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욕심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여 더 나은 것을 찾고 싶은 마음이 근원이고, 불안함은 알 수 없는 미래를 예측해보려는 마음이 근원입니다.
이런 생각 끝에 궁금한 것이 하나 더 생깁니다.
과연 사람 이외에 다른 동물들에게도 이런 욕심과 불안함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동물들도 종류가 많아서 일률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생물학적으로 인간과 좀 더 가깝게 진화한 동물에게서 욕심과 불안함의 특성이 많이 나타나고, 인간과 관계가 먼 동물에게서는 그러한 특성이 적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나 물 속의 물고기들보다는 원숭이, 고릴라, 침팬지 등에서 욕심과 불안함의 특성이 더 많이 나타난다는 얘기입니다. 인간과 더 가까울수록 욕심과 불안함이 더 많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이유로 이런 분화가 생겨난 것일까를 또 생각해보게 됩니다. 인간은 왜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욕심과 불안함이라는 것을 갖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인간도 그 처음은 단백질 덩어리로부터 시작하여 작은 세포를 만들면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생명의 기원에 대한 많은 글들에 나와 있습니다. 같은 시작점을 갖는 생명이 어느 지점에선가 분화되면서 여러 가지 동식물로 나뉘어져 온 것이지요.
자그마치 수 억 년에 걸쳐서 일어난 이러한 생명의 진화와 분화 과정 중에 인간이 나타난 것은 불과 만 여 년 정도 전입니다. 생명의 진화 전 과정을 하루 24시간 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이 세상에 있었던 시간은 정말 눈 깜박할 사이도 아닙니다.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서 인간에게 동물과는 다른 욕심과 불안함이 나타난 것일까요?
여러 동물들은 기후와 환경의 변화로 인해서 멸종과 생성을 반복하였습니다.
인간도 그런 과정 중에 나타난 것이라고 합니다.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하고 그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 중에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동물의 한 종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이해하려면 구석기 시대 정도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시대의 상황을 상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변화하는 기후와 험한 자연을 맞닥뜨려야 하고, 더구나 힘세고 강한 다른 동물들의 공격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이 인간의 조상들이 해야 할 일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일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내지 못했다면 인간은 아마 지금 이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조상들을 멸종으로부터 지키고 생존시켰던 그 특성을 찾는다면, 인간만이 가진 욕심과 불안의 근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전적, 인류학적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조상은 협동을 하는 능력과 유추를 하는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능력이 열등한 신체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다른 동물들의 공격과 험한 자연 환경에서도 살아남고 종족을 번식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이 클수록 생존할 확률이 높아지게 되고 그 능력이 가장 큰 것이 인간종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인간과 가까운 종일수록 인간과 유사한 특성을 많이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협동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협동도 능력이었다는 말이 조금 생소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생명의 본질은 이기적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협동이 생명의 본질과는 조금 다른 능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생명의 본질은 이기적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협동은 이타심 즉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험한 자연과 다른 강한 동물들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고, 나아가 그 동물들을 공격하여 식량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협동의 능력으로 인하여 인간의 조상들은 약한 신체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협동의 능력을 가진 인간의 조상이 점점 더 강한 집단이 되어 세상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조상만이 어떤 이유로 협동의 능력을 갖게 된 것일까 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이 마치 인간의 조상에게만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생긴 능력이라고 생각하면 안 될 것입니다. 수많은 진화의 갈래 속에서 협동의 능력을 갖는 집단이 조금씩 우위를 점해가는 과정 중에 가장 큰 능력을 갖는 집단이 인간의 조상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과 가까운 관계를 갖는 동물인 원숭이, 침팬지, 고릴라 등에서 인간과 비슷한 특징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인간이 가진 협동의 능력이 어떻게 욕심과 관계가 되는 것일까를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욕심은 이기심과 같은 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협동은 이타심에 바탕하고 있는 행동입니다. 이기심과 이타심은 전혀 다른 반대적 성격의 특성인데 어떻게 한 인간 안에서 동시에 공존하며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일까요?
이것이 사람의 욕심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인간이 갖는 이타심 즉 협동의 근원은 생존하고자 하는 본능 즉 이기심이 그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의 생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이기심을 위해서는 남을 배려하는 이타심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나의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서 남과의 협동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심성에는 이기심에 바탕한 이타심 이외에 자신의 희생에 기반한 이타심 즉 헌신의 형태도 있습니다. 헌신의 형태의 이타심은 인간이 더욱 진화하면서 생겨난 더 높은 차원의 정신적 능력입니다. 이런 헌신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고유한 특성이 됩니다. 이타심의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헌신에 대한 얘기는 다른 기회에 좀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맞부딪히는 성격의 두 마음, 이기심과 이타심이 인간 조상들의 생존을 만든 원동력이고 지금도 인간의 마음에 공존해 있는 것입니다. 이 두 마음이 욕심이라는 하나의 틀을 쓰고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부딪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기심 즉, 나를 생각하는 마음과 이타심 즉,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한 마음 안에 있으면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바로 비교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내 안에 남을 보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바로 비교하고, 나누고, 선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복잡해지고 대상이 다양하게 확장될수록 선택의 조합은 무수히 많아집니다. 그 많은 선택의 조합 속에서 가장 나은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 바로 번뇌인 것입니다. 번뇌는 바로 비교하고 분별하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유추하는 능력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유추의 기본은 조합을 하는 것입니다.
나무 가지와 돌을 각각 놓고 보다가, 자기로부터 떨어져 있는 곳에 닿을 수 있는 긴 나무 가지 끝에 때리거나 자를 수 있는 뭉툭하거나 날카로운 돌을 매달아서 도끼나 창을 만들면 강한 동물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 바로 유추의 능력입니다.
서로 다른 용도의 것을 조합하여 새로운 용도의 기구를 만드는 과정이 바로 유추의 능력인 것입니다. 인간의 조상을 생존할 수 있도록 하고, 세상을 지배하는 존재로 만든 많은 물건과 도구들이, 이 유추의 능력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조합하는 능력은 자꾸만 커져서 이제는 도구와 물건을 만들어 내는 일의 범위를 벗어나서 그 영역을 확대하게 됩니다.
어제 일어난 일과 오늘 일어나는 일의 관계도 생각해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즉 어제 비가 내린 후 오늘 들판에 파란 싹이 나는 것을 보면서 날씨와 자연의 변화와의 관계도 알 수 있게 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관찰을 통해서 태양과 달, 바람과 구름과 비등의 관계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외에 불과 물의 효용성도 알게 되었을 것이고, 차츰 세상 만물의 관계를 관찰해서 생존에 대한 지식을 쌓아나갔을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억도 생겨납니다.
이러한 능력은 계속 더 발전해 갑니다. 한 번 생긴 기억은 유추의 능력을 통해서 다가올 날들을 상상해보는 것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다가올 날 즉, 미래는 유추의 결과로 만들어낸 다른 것들과는 그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과거는 이미 알고 있는 일이고 현재는 지금 보고 있는 일이지만 미래는 아직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정해져 있지 않고 확인될 수 없는 미래이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그려볼 수 있는 미래의 모습에 대한 조합은 무궁무진합니다.
이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은 희망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공포가 되기도 합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 수없이 많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조합해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과거와 현재처럼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불확실성이 바로 공포의 원인이 되는 것이고, 이러한 공포가 바로 불안의 근원입니다. 불안은 인간의 조상들이 생존의 과정 속에서 발휘한 유추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이 현재까지 살아남아 번영할 수 있는 근본에는 협동과 유추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의 부산물로 이기심과 이타심에 바탕한 특이한 형태의 욕심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생긴 것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이러한 욕심과 불안의 다른 말은 번뇌와 망상입니다. 번뇌와 망상으로 인간은 마음의 평화를 잃고 늘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그 번뇌와 망상의 뿌리를 알고 보면 인간이 살아남아 번영을 할 수 있도록 해 준 특성인 것입니다. 생존과 번영을 가능하게 해준 근원이, 괴로움과 나아가 죽음의 근원이 된다는 이 역설이 아마도 인간이 지고 살아야 하는 원죄가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번뇌와 망상이 싫다고 그 근원을 없애는 것은, 곧 인간의 생존 근본을 없애는 일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번뇌와 망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 인간의 생존 아니 한 개인의 생존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즉 번뇌와 망상을 없앨 수는 없지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방법을 찾는 데에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한 번 생각을 정리해봅시다.
번뇌는 욕심을 근본으로 하고 욕심은 분별하고 비교하는 마음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망상은 유추하는 마음을 근본으로 하고, 유추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를 낳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번뇌와 망상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생존을 바라는 마음 즉 생존의 욕심으로 유추를 한 번 해봅시다. 역시 답도 이 욕심과 유추가 작용하는 과정 속에서 나올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정리한 생각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들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번뇌와 망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교하지 말고 또한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비교하지 말고 지금을 생각하라’ 다시 말하면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와 같은 말이 아닐까 합니다.
정리해 놓고 나서 보니 여러 책들에 많이 나오는 평범한 말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성철 스님이 남기신 말 중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이렇습니다. ‘깨닫기 전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었다. 한 번 보고 나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다시 세월이 흘러 깊게 깨닫고 보니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같은 산과 물인데 깨닫기 전과 후의 산과 물은 서로 의미가 다릅니다.
‘지금 너의 최선을 다하라’하는 말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합니다. 이 말을 그냥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열심히 살면 되지 하는 정도로 알고는, 살면서 가끔 그저 생각해보는 어구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 것처럼 깊게 살펴보면 그것이 갖는 의미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말 뜻의 의미를 깊게 알면 그것이 그저 평범한 생활 수칙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과 관계된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늘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유롭고, 산 속의 다람쥐처럼 가볍기를 바랍니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바로 번뇌와 망상의 괴로움을 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번뇌와 망상의 근원을 알고 해결하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고, 그러면 자유롭고 가볍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비교하는 마음을 버리고 지금 나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그 일을 시작하는 첫걸음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비교하지 않는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는 일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함은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종교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신에 기대어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 불안함을 해결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여,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 문구을 생각해보면 참 절묘함을 느낍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미래에 대한 믿음도 가질 수 있게 하는 역할을 아주 잘 수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와 믿음의 종류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어서 즐겁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일단 저부터 그렇게 해볼 생각입니다만 이제쯤 다시 느끼는 것은 그것이 안다고 해서 모두 해결되는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알고 행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만 못하다고 하는 옛말도 있듯이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 마음이 괴로워질 때면 다시금 그 근본을 상기하며 마음이 편안해지도록 노력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효연 소래안 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