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파르나스의 전설:모딜리아니 展

  • 등록 2015.09.01 13:36:17
크게보기

Relay Essay-제2056번째

"Pull a long face”하면 “죽상을 하다”의 의미다. 여기서 long은 ‘엄숙한, 우울한’이다. 옛 어른들은 얼굴이 너무 길면 ‘밉상’이라며, 2세들 배필 고르기에서 일단 제쳐놓으셨다. 이제는 얼굴이나 체격이 서구화하여 이문세씨의 착한 ‘말 상’은 오히려 매력이 되었지만 전형적인 긴 얼굴은 턱이 큰 치받이(Class III 부정교합)로, 어렸을 때 인형 같던 책받침의 여왕이 성장호르몬 장애로 얼굴과 턱이 길어지면서, 180cm 장신이 된 브룩 쉴즈의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말투마저 썰렁한 김구라씨는, “비호감 전성시대”의 풍조 속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막장드라마의 달인 임성한 작가가 중도하차한 적이 없고, 소위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조영남씨와 “욕쟁이 할머니” 캐릭터로 살아온 김수미씨가 공개적으로 싸우고도(‘나를 돌아봐’에서), 노이즈마케팅쯤으로 쉽게 풀리는 것을 보면, 비호감과 막장은 보다 센 자극을 은근히 바라는 국가적인 사회병리현상 같다.

동물의 세계는 다르다. 초원의 신사 기린이나 사슴은 물론 정작 얼굴이 긴 말도 선(善)한 이미지다. 44세의 아까운 나이에 과로로 쓰러진 처녀시인 노천명은 사슴을 두고,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라고 노래하였다. 중학교 미술교과서에서 모딜리아니를 만났을 때, 맨 처음 떠오른 이미지가 바로 노천명의 시 사슴이었다.

모딜리아니(1884~1920)는 1906년 파리에 유학 온 이래 눈을 감을 때까지 인물만을 그렸기에, 그림이 단순하고 아름다우며 일관된 패턴으로, 극도의 절제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했다고 말한다. 경쾌한 붓 터치가 이를 뒷받침하는데, 생계를 위하여 조각 등 외도를 시도하지만, 그의 천재성은 필생의 화두에서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아, 14년 동안 300여 점의 그림을 남긴다. 그림은 안 팔려도 미남으로서 인기가 있던 그는 1917년, 13년 연하의 쟌느 에뷔테른을 만난다. 그가 결핵으로 숨질 때까지 3년간 둘은 불같은 사랑을 하지만, 그녀 부모는 가난한 이탈리아 출신 유태인 화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남편의 장례조차 치러주지 않는 부모를 원망하며 천국에서도 모델이 되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는 듯, 둘째를 임신한 몸(9개월)으로 친정집 2층에서 뛰어내린다. 화가는 마르고 목이 길며 고개를 갸웃한 아내의 초상 여러 점을 남겼지만 누드는 없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노천명의 시처럼 수려한 나르시시스트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쟌느. 그는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 때 당신의 눈동자를 그릴 것이다”고 말하며 눈동자를 미완성으로 비워두었다. 서른다섯에 스물둘의 임신한 아내를 두고, 아내의 초상에 눈을 그려 넣지(畵龍點睛) 못한 아쉬움으로 어떻게 두 눈을 감았을까? 바로 다음날 남편의 뒤를 따라간 그녀는 10년 뒤에야 큰 형부 주세페의 도움으로 남편의 곁에 묻히게 된다.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 ‘성의(聖衣: the Robe, 1953)’ 예고편을 표준 렌즈에 걸면, 모든 것이 모딜리아니처럼 길어 신기했다. 그가 인물의 초상만을 고집했기에 얼핏 드러나지는 않지만, 샤갈에서 달리로 넘어가는 초현실주의의 예고편 냄새가 나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일까? 이런 해석은 아마추어의 특권이자 즐거움 아닌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몽파르나스의 전설’ 전(展: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을 본 후, 모딜리아니 여인들의 긴 얼굴이 밉기는커녕 더욱 더 우아해 보인다.

파리에서 불우한 아웃사이더로 살다가 요절한, 이 천재 화가의 묘비명(墓碑銘)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이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모딜리아니전은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10월 4일까지 열린다.

쌈지골목 계절밥상

러시아의 유태인인 색채의 마술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은, 거의 평생을 외국에서 살며, “고향의 꿈과 환상”을 그려서 만인의 사랑을 받았다. 꿈은 현실(reality)을 초월(sur)하고 샤갈의 꿈에는 동화적인 상상력이 흘러넘쳐, 젊은 화가들을 초현실주의(sur-realism)로 인도하는 동기가 되었다. 달리·미로·에른스트… 미술학도 시절부터 이단아였던 천재 달리(Salvador Dali: 1904-1989)는 프로이드로부터 “잠재의식”이라는 혁명적 이론의 세례를 받은 행운아였다. 분방하고 무한한 상상력의 ‘해방구’를 만나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샤갈과 달리의 중간쯤에 활동한 모딜리아니의 간결한 선과 비현실적인 얼굴 비율이, 사실은 아프리카미술의 표현법이라지만, 필자는 초현실주의가 싹트는 냄새를 맡았다. 지난 2월에 관람한, 달리의 유산에 고전의 구상과 현대의 추상이 어우러져 통섭에 가까운 회화세계를 구축한 러시아 출신 쿠쉬(Vladimir Kush: 1965) 한국특별전의 감동 탓인지도 모른다.

전시회를 준비한 시인 김경주의 해설은 금상첨화였는데, 그는 super-realis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본래 sur-는 super라는 뜻의 접두사로서 결국 같은 말인데, 이렇게 풀어놓으니 묘한 울림이 온다. 역시 문화의 폭과 깊이는 상상력 나름일까?

모딜리아니 전(展: 한가람 미술관)을 나와 인사동 쌈지골목을 향했다. 이따금 촉(觸)의 연필심을 벼리는 필자 나름의 순례코스다. 좁다란 골목에 잡다한 인종이 흘러넘치고, 작은 마당이 있는 3층 아케이드에 잘게 썰어놓은 상점마다, 골동품인지 잡동사니(antique or trinkets)인지 분간이 안가는 신기한 방물들. 고 천상병 시인의 유산인 다실 ‘귀천’을 비롯하여 잠시 아픈 다리를 쉬어가는 주막집. 서울과 한양이 공존하고, 잰걸음도 황소걸음도 OK로, 시간이 멈춘 “네 멋대로 사세요”의 분위기. 아들 내외의 안내로 한식 뷔페 ‘계절 밥상’에 저녁식사를 예약했다.

콩나물·선지에서 북어 국까지, 밥집의 아침 메뉴는 주로 해장국이요, 서양의 푸드(food) 대신 우리는 마실 음자 음식을 먹고산다. 곁들인 반주(飯酒)는 기본이요, 수프보다는 국, 스튜보다는 찌개, 요점은 국물이다. 외국에서 잘 안 쓰는 반찬의 찬(饌)은 술안주를 목표로 진화하였다. 조선시대 나그네의 요기 장소는 주막이요, 외국인들이 궁금해 하는 드라마의 단골손님, 파란 유리병의 정체는 바로 소주다.

오리엔테이션도 MT도 퇴근길 단합대회도 포장마차의 푸념도, 결국은 파란 유리병을 에워싼 파티다. 과음을 경계하여 풍토가 변해도, 여전히 푸짐한 진안주가 뷔페의 핵심이기에, 가격에 상관없이 한식뷔페의 인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날 계절밥상의 계절요리는 알싸한 오징어 두루치기에 매콤 달달한 삼겹살볶음, 접시에 담으니 똑 떨어지는 ‘오삼 불고기’다. 파란유리병이 없는 아쉬움 대신 이 가게가 자랑하는 ‘배 조청 막걸리’가 있다. 열무김치와 단짝인 평사리 악양 막걸리와 산채나물 안주를 곁들인 지리산 조껍데기 술과 함께, 3대 막걸리로 꼽아도 무방하겠다.

보통 주당은 술자리에서 밥을 사양하지만, 곤드레 비빔밥 반 공기에 전통 육개장은 환상이다. 찹쌀 부꾸미 후식에 입가심은 달달한 호박 식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S라면도, 매년 눈에 안 보이는 변화를 주고 있단다. 크로스오버·퓨전·궁극적인 융합… 음식문화도 미술계도 적극적인 변화 없이는 살아남기가 힘들다.

두 시간쯤 걸으며 그림을 감상하고, 해설을 읽거나 이어폰에 귀를 기울이는 전시회 관람은, 적당히 식욕을 돋우고 변비도 예방한다. 선진국의 큰 갤러리처럼 염가와 고급의 레스토랑 세트가 없는 보통 화랑에서는, 관람 후 미리 점 찍어둔 진짜 맛 집을 찾아 즐기는 것이 “전람회 나들이”를 마무리하는 멋진 끝내기다.


임철중 치협 전 대의원총회 의장

임철중 원장
Copyright @2013 치의신보 Corp. All rights reserved.



주소 : 서울시 성동구 광나루로 257(송정동) 대한치과의사협회 회관 3층 | 등록번호 : 서울, 아52234 | 등록일자 : 2019.03.25 | 발행인 박태근 | 편집인 이석초 대표전화 : 02-2024-9200 | FAX : 02-468-4653 | 편집국 02-2024-9210 | 광고관리국 02-2024-9290 | Copyright © 치의신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