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페이닥터나 위생사가 나갈 때 안 받기로 구두약속한 퇴직금을 요구하는 일이 있어서 관례와 다른 일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난 적이 있다. 법에 따르면 퇴직금을 받지 않기로 하는 약속 자체가 성립될 수 없으므로 퇴직금을 주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구두 약속을 근거로 하여 퇴직금을 포함하여 좀 높게 급여를 책정한 원장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그지없다. 근로 계약서에 퇴직금을 분할 지급으로 명시하면 해결될 일로 생각된다.
품위 있는 집단일수록 관례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약속을 한 페이닥터들은 관례대로 퇴직금을 안 받는 경우가 많고 위생사들은 매년 서류상 정산이 안 된 퇴직금이 있다면 고스란히 주어야 하는 것이 경향인 것 같다. 그럼 돈을 안 받으면 품위가 있고 돈을 받으면 품위가 없는 건지. 품위라는 말은 참 애매하고 주관적이다.
오랫동안 합리적이고 훌륭한 관례를 지켜온 역사가 쌓이면 해당 집단에는 자긍심을 안겨준다. 또한 관례는 일처리를 쉽고 빠르게 하는 순기능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법대로 하자며 관례를 깨고 나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 사람을 관례와 다르다며 제지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을까? 품위 있는 집단일수록 관례를 어기는 사람에 대해서는 나쁜 평판이 붙어 다닐 가능성이 크다. 관례를 무시한다는 건 평판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는, 인간관계를 무시하는 막무가내 식 인간이라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나는 2015학년도에 딸이 다니는 S중학교의 운영위원장을 맡았었다. 내 임기까지는 1학년 때 한번 운영위원이 되면 계속 연임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학교 법에는 엄연히 경선을 하도록 되어 있다. 최근 학부모의 학교 행정 참여가 늘어나면서 예전에는 아는 사람만 알던 순전히 봉사직인 운영위원과 학부모회 임원에 많은 관심들을 가지고 있다.
올해 신입생 운영위원으로는 2명 뽑는데 5명이 후보로 등록했고 1학년에서 2학년 올라가는 운영위원은 기존에 2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한명이 더 등록하는 이변이 벌어졌다. 즉 관례를 깨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이 일을 두고 후배 운영위원이 전화를 해서 이건 있는 사람을 나가라 하는 것밖에 더 되냐며 피곤하게 하고 상처가 남는 것보다는 각 학년별로 두 명씩만 남도록 조율을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건 학교법과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며 정중하지만 확고하게 거절을 했다. 사전조율의 움직임이 포착되자마자 교육청에는 학교 법을 어기는 자가 있다며 민원이 들어갔다. 학교는 진땀을 흘리며 해명하고 분위기는 더욱 경직되었다. 후보자들은 각자 인맥을 동원하여 선거운동에 들어가고 각자 연설문을 쓰기에 바빴다. 나는 내가 예뻐하는 후보에게 연설문도 써주고 선거 전략을 짜주며 도와주었다. 그건 해도 될 것 같았다.
신입생 후보자는 선거 당일 3명이 자진 사퇴하여 경선 없이 2명이 당선되었으나 2학년 위원은 경선 결과 아쉬운 표차로 내가 예뻐하는 기존 위원이 떨어졌다. 그날은 어찌나 마음이 어둡던지. 그러나 결과에는 승복하는 것이 또 원칙인지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주 후 그 위원이 다시 지역위원에 도전하여 기어코 운영위원회에 입성하였고 또 작년부터 내가 인수 인계해준 3학년 위원이 위원장으로 당선되어(역시 경선이었다.) 무리 없는 운영위원회가 꾸려졌다는 낭보가 들려왔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관례를 깨는 사람들과 함께 대의를 살리려면 참 피곤하고 힘들지만 노력하면 결국 좋은 결과가 온다는 것을.
우리 사회에는 많은 관례가 존재한다. 많은 관례들은 훌륭한 유산이 되어 도움을 주고 있으나 아직도 좋지 못한 관례는 남아있다. 의사 사회에는 여러 병폐가 있었으나 제약회사 리베이트, 교수의 학생에 대한 잘못된 권위행사, 대학원생 논문 대필 등은 내가 학생일 때 보다 적극 개선되어 온 것으로 생각된다. 또 법조계의 전관예우나 회사에서 법정 출산 휴가를 어기는 것 또한 나쁜 관례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관례는 법과 원칙이 지켜진 후에만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불의를 보았을 때 참으며 주로 하늘에 맡겨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후후^^
문득 1988년도에 최류탄 연기가 가득하던 대학교정을 떠 올려본다. 우리 선후배들과 우리들은 독재타도를 외치며 민주주의와 법치를 위해 투쟁했다. 덕분에 우리는 대통령 직선제로 여러 정부를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이 소중한 가치들을 관례라는 이름으로 묻어버리지는 않는지? 아니 다른 사람들을 차치하고서라도 기성세대인 나 또한 이러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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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나 서울 로고스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