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신은 당신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

2023.07.19 15:36:29

Relay Essay 제2562번째

치과의사로서 살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난관에 대해 좌절하지 않으려면 모든 비극적인 일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전제를 최대한 넓고 깊게 깔아 두는 게 현명하다. 갑자기 초진상 환자가 치과에 드러누워 분신 소동을 벌이더라도, 믿었던 수납직원이 수억을 횡령하고 잠적하더라도, 치과의사라면 언제나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음을 깨닫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갑작스러운 비극 앞에서 좌절 없이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지혜다.

 

세네카를 비롯한 스토아 철학자들은, 비극적 상황이라는 것을 마치 자연재해처럼 아무런 의도나 감정 없이 내 앞에 닥치는 것으로 보았다. 거기엔 아무런 명분도 원한도 없으며, 상대가 악인이든 선인이든 지위가 높든 낮든 상관없이 다가오는 것이다. 따라서 그걸 맞이하는 개인 역시 그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런 돌발적인 상황에 정념이 이끌리는 것은, 좌절과 분노를 불러일으키며, 특히 스스로 정의롭고 선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개인에게는 더욱 큰 분노를 유발한다. 그러나 애초에 비극은 상대가 선인이든 악인이든 상관없이, 마치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지고 땅에서 지진이 발생하듯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인데, 이 시점에서 ‘나는 선하고 정의롭게 살아왔는데 왜 번개가 하필 내 머리 위로 떨어졌나요?”라면서 세상에 원한을 품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세네카는 그의 저서 분노에 관하여 III에서, 강의 범람에 분노하여 강에게 앙갚음하느라 자기 군사를 희생시키고 쓸데없이 진군을 지체시킨 페르시아의 대왕 키루스 대제의 어리석은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기원전 539년 키루스 대제는 아시리아 원정길에서 갑자기 범람해버린 강의 물살에 아끼는 명마를 잃고 만다. 감히 만인이 칭송하는 대왕의 명마를 삼켜버린 강에 분노한 키루스는 원래 목적이었던 아시리아 원정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강에게 복수하기 위해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대 삽질’을 시작한다. 강의 좌우 양쪽으로 수로를 뚫어 강의 물살을 약하게 만드는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다. 아시리아 정벌을 위해 진군하던 군사들은 졸지에 아시리아가 아닌 강과 기나긴 사투를 시작하게 되었고, 수개월에 이르는 ‘대 삽질’의 결과 정말로 그 강의 거센 물줄기는 실개천처럼 약해졌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에서 키루스는 목표를 달성한 것일까? 강에 대한 복수에 성공한 키루스에게는 마음의 평화와 만족이 찾아왔을까? 그럴 리 없다. 그가 그 당시에 해야 했을 가장 현명한 선택은, 강의 범람이라는 예상치 못한 재난 상황을 맞이하여, 강은 나에게 아무런 원한이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직시하고, 명료한 정신으로 그 시점의 현실적인 해결책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불필요한 정념을 투영하여 감정적으로 대응해버린 결과, 강에게 복수하겠다는 우스운 결정을 내리게 되어 수천 년 뒤 한 치과의사의 글에까지 소환되어 대왕 체면을 구기고 있는 것이다.

 

키루스 대왕의 일화는, 차분한 상황에서 제3자가 듣기에는 참으로 우스워 보인다. 하지만, ‘우리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가?’가 세네카의 문제 제기다. 특히나 본인이 평소에도 정의롭고 올바른 길을 걸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라면, 재난의 상황이 닥쳤을 때, 딱 키루스와 같은 심리상태가 되기 좋다. 내가 이렇게까지 원칙을 잘 지키고 살아왔는데 왜 갑자기 지진이 내 집을 무너뜨렸느냐? 왜 번개는 내 머리 위로 떨어졌느냐? 하는 등의 한탄은 오히려 올바르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자에게서 더욱 크게 쓰라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게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게 세네카의 설명이다. 땅이 사람 봐서 갈라지나? 번개가 사람 봐서 내리치나? 상대가 누구든 간에 재앙은 그저 자기의 길을 가던 것일 뿐이다. 지진이나 번개에 원한을 가져 봤자 다 부질없는 짓인 것처럼, 당신에게 닥친 비극 역시 마찬가지다. 그 어떤 비극이든지 마치 번개가 내리치는 것처럼 어느 순간 당신 앞에 다가와 있지만, 운명의 신은 당신에게 감정이 없다.

 

치과의사로서 경험하게 되는 각종 비극적 상황도 사실, 내가 어떤 치과의사이냐와 상관없이 그저 나에게 다가온다. 특별히 금전적 보상도 적고, 잘했다고 환자분이 당장 알아주지도 않는 ‘근관치료’에 장인정신을 갖고 열과 성을 다했던 훌륭한 치과의사라 해도, 뻔뻔한 초진상 환자를 만나서 “치료를 이따위로 했냐”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이렇게나 원칙을 지키고 진료했는데 왜 이런 비참한 꼴을 당해야 하나 앞으로 치료는 대충 해야겠다”면서 자신의 신념을 내던질 필요는 전혀 없다. 그 진상 환자분은, 마치 번개가 치고 땅이 갈라지듯 별다른 감정 없이 우연히 당신의 병원에 들른 것이다. 당신이 스스로의 진료에 신념을 가지고 장인정신을 펼쳤었다면, 굳이 감정 없이 그대에게 다가온 숙명에 기분 상해서 소중한 신념을 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진상분은 그대에게 감정이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그 진상분이 당신의 치과를 찾아가게 만든 그 운명의 신은, 당신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다.

 

감정 없이 범람하는 강물에 기분 상해서 강에게 복수하겠다고 삽질을 시켰던 게 어이없는 결정이듯이, 아무런 감정 없이 다가온 시련에 마음이 다쳐 신념을 내던지고 삐뚤어져 버리겠다는 게 얼마나 어이없는 결정인가. 지금, 이 순간 시련의 상황을 맞이하여 유사한 고민으로 신념을 내동댕이치려는 동료 치의분이 계신다면, 마음을 추스르고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의 신념을 고수하길 기원한다. 10년 전 어느 날, 진상분께 시달리고 잠시 삐뚤어졌던 어린 나에게 이 조언을 해주고 싶다.

박상준 서울S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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