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 그라운드

2023.09.19 10:23:56

이미연 칼럼

어릴 때 살던 집 앞에는 제법 너른 골목길이 있었다. 동네 친구들은 그 길에서 술래잡기도 하고 피구도 하고 가게 앞 입간판을 골대 삼아 축구도 하고 놀았지만,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야구였다. 그때는 프로야구리그가 출범한지 얼마 안 되어, 모두가 야구에 열광하던 시절이었다.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초등학교 운동장도 있었건만, 집 앞의 골목길이면 충분했다. 우리는 밥숟가락을 내려놓자마자 달려나가 지체하지 않고 바로 공을 치고 놀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집 앞 계단에서 수직선을 그어 만나는 골목길 중앙점에 홈 플레이트였다. 골목 오른편 초록대문집에서 세 걸음 걸어나온 곳을 1루, 왼쪽 전봇대 한 발 옆을 3루 베이스로 잡는 식이었다. 홈에서 베이스를 잇는 가상선에 미치지 못하면 파울, 세탁소 입간판을 넘어가면 2루타, 빨간 지붕집 대문을 넘기면 그라운드 홈런으로 치기로 했다. 다 모여도 9명이 되지 못하는 날도 많으니, 프로선수단처럼 꽉찬 스쿼드와 심판진까지 갖출 순 없었다. 다 놀고 싶은 꼬마들이므로 우리는 다같이 선수이고 또 심판이었다. 우리끼리 함께 규칙을 정했다. 미리 알 수 없는 것은 다같이 의논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다같이 한 번이라도 더 공을 던지고 치며 더 오래 즐겁게 노는 것이 중요했다. 수비가 더 서툴어 공을 잡기보다 놓치고 주으러 다니기 더 바빴지만, 공수는 매일 바뀌니 피차 일반이었다. 꼬마들은 게임을 함께 지켰다. 그것이 우리 그라운드의 신의였다.

 

만약에 누가 홈런을 친 다음에, 한 아이가 일어나 빨간 지붕집 대문은 우리끼리 정한 규칙일 뿐 공인규격이 아니므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어떨까. 다른 아이가 일어나 홈런 친 아이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므로 이 경기는 무효라고 우긴다면 어떻게 될까. 공도 비공인구인데 이 경기가 성립되는지 대한야구협회에 질의를 하고, 그라운드가 규격에 적합하지 않다고 제소하겠다고 한다면 말이다. 규약을 지키지 않으면 상호신뢰가 깨어진다. 다시는 함께 야구를 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고 우리의 골목길 플레이 그라운드는 버려졌을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 골목에서는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이 우리 현실에서는 일어나고 있다. 제33대 치협 회장선거가 끝나고 새 집행부가 출범한지 넉 달이 더 지났다. 그러나 지난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이들이 모여 부정선거 척결연합(김민겸·장재완·최치원)을 결성하고, 법적판단을 받겠다며 우리 협회의 규약이나 회원의 결단은 모른 척하고 있다. 여러 해 동안 협회의 질곡을 겪어온 원로 의장단의 사려깊은 권고에도 날선 대답만 할 뿐이다. 놀랍게도 이 연합은 결선선거를 앞둔 전날밤 협회 선거규정을 위배해가며 담합했던 후보자들의 모임과 구성이 동일하다. 왜 그들은 항상 모두의 규칙에서 자신들만은 예외적인 절대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할까.

 

약속이나 합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우리 3만여 대한치과의사협회 구성원에 대한 존중이 없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회무란 회원을 대신해서 회원의 삶을 돌보는 일이다.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서 서로 이견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똑같이 개원치과의사로 살아가면서 우리가 서 있는 그라운드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 개별 집행부의 역량을 떠나, 협회가 강구할 수 있는 방법도 정해져 있다. 지난 33대 선거 시에 각 후보자들의 공약이 비슷하였음을 모두 기억하실 것이다. 그 중에 회원이 누군가를 고른 것은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킬 것인가를 각자 판단한 결과라 보아도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회원의 의사를 존중하여 누가 되었어도 수행할 일에 적극 조력을 하는 것이, 회원의 발을 대신하고자 자처한 사람의 마땅한 도리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또 그렇지 못하니 개탄할 일이다.

 

우리 회원 3만여명이 결코 작은 숫자는 아니나, 나라 전체를 두고 표 숫자로 따지자면 큰 수가 되지 못한다. 또한 우리는 의료인이라는 대한민국에서 특수한 기대를 받는 직분에 속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회원의 권익 향상 뿐만이 아니라 국민건강 증진과 국가보건정책 개선에 기여하므로써 우리 치과의사 협회 회원의 위상을 높이는 일을 염두에 둔 행보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집행부와 무조건 다른 주장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바쁘니, 우리 협회가 대표하는 치과의사들을 상대방 정부 부처가 얼마나 업수이 여길지 속이 상한다. 우리의 주장이 제대로 신중하게 받아들여지겠는가 안타깝다.

 

마음 속 중심에 우리 회원을 놓고 다시 생각해주시기 바란다. 무엇이 회원을 위한 행동인지 진정 고심하여 우리의 그라운드를 존중하고 지켜나가길 부탁드린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미연 치협 공보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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