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흐, 나의 반려묘

  • 등록 2025.12.19 13: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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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러흐는 우리 집 막내 고양이다. 한국 토종 삼색 고양이이며, 생후 4개월 정도에 우리 집 식구가 되었다. 주택가 화단에서 태어나 삐약삐약 울고 있던 어린 고양이를 나의 친인이 발견하여 동물병원에 맡겼는데, 수일이 지나도 분양이 되지 않아 내가 덥석 그 고양이를 맡게 되었던 것이었다. 나는 당시에 이미 두 마리의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기에, 한 마리 더 키우는 게 별일인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손쉽게 결정을 내렸다. 키우던 고양이들이 모두 ‘흐’자 돌림이었기에 때문에, 나는 이 막내 고양이에게 ‘러흐’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러블리(Lovely)’의 ‘러’자를 넣어서, ‘사랑스러운 고양이’라는 의미로.

 

하지만, 러흐는 지독한 말썽쟁이였다. 애묘인의 집에서 태어나 좋은 환경에서만 자란 첫째 고양이와, 길에서 태어나자마자 구조되어 내가 직접 젖병을 물려 키운 둘째 고양이와는 달랐다. 4개월 동안 길고양이로 살아온 습성이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어린 러흐가 보여준 야생성과 활동성은 나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러흐는 내가 아끼던 화분 위에 올라가서 온종일 흙을 팠고 뿌리와 이파리를 모조리 물어뜯었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에 매달려 옷을 망가뜨리기도 했다. 모두가 곤히 잠든 새벽에 책상, 테이블, 세면대 위에 있는 물건들을 마구 바닥으로 떨어뜨려 잠을 깨우기도 했다. 결국 내가 몇 번 소리를 질렀더니, 러흐는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내가 약간 언성을 높일라치면, 러흐는 내 손이 닿지 못하는 곳으로 쏜살같이 도망을 가버렸다. 결국 우리의 관계는 만난 지 몇 주 만에 최악의 상태로 치달아 버리고 말았다.

 

우리의 관계에 약간의 변화 조짐이 생겨난 것은, 러흐가 1살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즈음 나는 집 안에 있던 모든 화분을 처분하였고, 옷이나 잡동사니 등을 러흐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소소하게 수납하기 시작했다. 러흐의 관심을 끌 만한 예쁜 패브릭 가구나 침구 등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다. 그리고 그즈음, 러흐는 동물병원에서 중성화 수술을 받았다. 우리 집에 입양되기 직전에 동물병원에서 며칠을 보냈던 기억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고 때문인지, 러흐는 동물병원에서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집에 데려왔더니 러흐는 몇 날 며칠 동안 내 옆에서 잠만 잤다. 그리고 이후에는 어쩐지 야생성과 활동성이 확 꺾인 느낌이었다. 갑자기 어른 고양이가 된 것만 같았다. 말썽쟁이 막내 고양이와 함께하기 위해 고수하던 라이프스타일을 양보한 나, 그리고 동물병원에서 고생스러운 수술을 한 이후 얌전한 어른 고양이(?)가 되어버린 러흐. 우리는 그렇게, 예전보다 누그러든 모습으로 서로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다.

 

러흐는 이제 많이 자라 어느덧 한국 나이로 5살이 되었다. 암컷이라서 그런지,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다른 두 마리의 수컷 고양이들보다 덩치도 작고 다리가 유난히 약하다. 러흐가 점프를 할 때면 조마조마할때가 많다. 하지만 야무지게도 욕심부리지 않고 무리한 점프는 하지 않는다. 다른 고양이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면 러흐는 스스로 먼저 자기 자리를 양보한다. 하지만 이내 더 좋은 명당자리를 찾아내고 편안하게 자리를 잡는다. 가끔 내가 네모난 그릇에 츄르(고양이가 좋아하는 간식으로, ‘잼’처럼 생겼다.)를 담아 줄 때가 있다. 그러면 다른 두 고양이들이 먼저 그릇에 머리를 박고 티격 대며 츄르를 먹는다. 러흐는 옆에서 조용히 기다리다가 다른 고양이들이 다 먹고 난 후에 앞발로 네모난 그릇을 돌려가며 모서리에 끼어 있는 츄르를 야무지게 핥아먹는다. 또 러흐는 쥐 인형을 아주 재미나게 가지고 논다. 마치 살아 있는 쥐를 대하는 느낌인데, 러흐가 쥐 인형을 가지고 놀 때면 다른 고양이들도 그 모습을 구경할 정도이다.

 

러흐는 반려인인 나에게, 삶에 대한 애착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해 주었다. 혼자서 수개월 동안 밖에서, 그 자그마한 몸집으로 살아남아, 낯선 환경에 다시 적응하고, 여전히 약한 존재이지만 새로운 물건이나 장난감을 보면 눈동자를 반짝이는 고양이. 가끔 스트레스를 받거나 몸이 힘들어 모든 것이 다 귀찮아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가만히 러흐를 바라본다. 가끔 저 기분 좋을 때는 눈치 빠르게 먼저 다가와서 내 손바닥에 이마를 부빈다. 많은 것을 양보해서 그녀를 내 삶으로 이끈 것이 큰 복이었다. 삶에 감당하기 힘든 변수가 생길 때마다 나는 러흐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고양이들이 한 번에 뛰어내리는 계단을 두 번, 세 번에 걸쳐 조심스럽게 뛰어내리던 그 모습을……

 

 

 

 

정유란 원장

 

- 원광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 모두애치과의원 원장

 

 

정유란 모두애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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