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의 나라, AI의 시대, 인간의 역할은 어디에

  • 등록 2026.01.21 14: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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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윤 칼럼

요즘 경제면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를 꼽으라면 단연 ‘반도체’입니다.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반도체는 TV, 스마트폰, 자동차, 컴퓨터 등 우리 일상에 필수적인 거의 모든 전자·통신기기의 핵심 부품입니다. 반도체란 전자가 도체나 진공에서만 흐르던 기존의 한계를 넘어, 완전한 도체도 절연체도 아닌 중간 영역, 즉 semi(반)+conductor(도체)의 성질을 가진 고체 물질을 의미합니다.
반도체 산업의 출발점은 1947년 12월 23일, 미국 벨연구소에서 개발된 트랜지스터입니다.
이 작은 발명은 이후 인류의 산업 구조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모토로라와 벨연구소에서 근무했던 강기동 박사와 강대원 박사가 1973년 ‘한국반도체’를 설립하였지만, 당시 한국은 반도체 산업이 성장하기엔 환경이 열악했고, 결국 경영난에 빠진 회사를 삼성전자가 인수하게 됩니다.
삼성의 미래가 반도체에 달려 있다고 판단한 이건희 부회장은 수차례 건의 끝에 이병철 회장을 설득했고, 1983년 2월 일본에서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 선언합니다. 이른바 ‘동경 선언’이죠. 당시 도시바, 히타치, NEC, 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들이 세계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고, 삼성의 64K D램 개발은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일본 기업들이 공장 건설에 18개월을 들이던 시절, 삼성은 6개월 만에 기흥공장 1차 라인을 완공했고, 또 6개월 뒤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반도체의 위상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장면입니다.

 

2025년 말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약 7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AI 시대의 핵심 부품인 HBM(고대역폭 메모리) 분야에서는 SK하이닉스가 세계 점유율 60%를 넘기고 있습니다.
평택 삼성 캠퍼스와 용인 SK하이닉스 클러스터는 규모부터 상상을 초월합니다. 평택 P5 공장은 축구장 54배 크기로 단일 반도체 공장 기준 세계 최대이며, 용인 클러스터 1기 팹에만 120조 원이 투입되는 국가적 프로젝트입니다. 반도체는 이제 기업의 사업을 넘어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전략 자산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미·중 무역 분쟁에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갈등이 정점에 달했을 때 대만의 TSMC가 중국 화웨이의 반도체 설계 자회사 하이실리콘과의 거래를 중단하자, 화웨이는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반도체가 아니었다면 대만이 중국을 압도하는 이 장면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반도체는 국가 존립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최근 반도체 산업이 다시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AI 기술의 급속한 확산입니다. AI 연산에 최적화된 고성능·고효율 반도체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산업 전체가 다시 한 번 도약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일자리를 위협하는 AI가 동시에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산업의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기, 개발자 부족으로 높은 연봉을 받으며 채용됐던 엔지니어들이, 자신들이 만든 AI로 인해 일자리를 위협받는 상황과 데자뷰가 될까 두렵습니다.
AI의 영향은 의료, 회계, 법조계까지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의료 인력이 부족해 응급실 ‘뺑뺑이’가 잦았던 경기도 북부 지역에서는 AI가 응급실 당직의이자 영상의학과 전문의 역할을 일부 대체하고 있습니다. 야간 영상 판독의가 없어 2~3시간씩 병원을 전전하던 상황이, AI 판독 도입 후 대기 시간이 30분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전문의 부족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AI로 상당 부분 해소된 것입니다.

 

회계사와 변호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과거 1~3년 차 전문직이 담당하던 반복적이고 정형화된 업무를 AI가 흡수하면서, 국내 4대 회계법인의 신입 회계사 채용 규모는 2019년 약 1,100명에서 2025년 700명 수준으로 30% 이상 감소했습니다.
전문지식 하나로 부와 명예를 독점하던 고소득 전문직이 오히려 AI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데, 이는 ‘모라벡의 역설’로 설명됩니다. 인간에게 어려운 수학, 논리, 법률 해석은 AI에게 쉽지만, 인간에게 쉬운 걷기, 운동, 정교한 손기술은 AI에게 어렵다는 이론입니다. 정형화·수치화 가능한 두뇌 노동일수록 가장 먼저 대체되고 있는 셈입니다.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습니다.
“AI가 올 것인가?”가 아니라, “AI가 이미 온 시대에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AI 시대의 생존 전략은 단순한 기술 습득이 아닙니다. 코딩을 배우고 AI 도구를 다룬다고 해서 안전해지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기술은 빠르게 평준화되고, 도구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습니다. 차이는 사람의 사고 방식과 태도에서 갈리게 됩니다.
첫째, 문제를 푸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AI는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데 탁월하지만,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지는 판단하지 못합니다. 시장의 불편함, 고객이 말하지 않는 진짜 욕구, 기술로 해결할 가치가 있는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은 자동화되지 않습니다.

 

둘째, AI를 경쟁자가 아닌 증폭기로 사용해야 합니다.
AI와 경쟁하려는 순간 인간은 불리해집니다. 대신 AI를 활용해 사고의 깊이와 속도를 확장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AI를 ‘쓸 줄 아느냐’가 아니라, AI를 통해 자신의 사고 수준을 어디까지 끌어올리느냐죠.

 

셋째, 전문성보다 전이 가능한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특정 기술의 수명은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학습 능력, 구조화 능력, 의사결정 능력처럼 환경이 바뀌어도 다시 적응할 수 있는 힘이 중요해집니다.

 

넷째,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해야 합니다.
공감, 윤리적 판단, 맥락 이해, 책임 있는 결정은 여전히 인간의 몫입니다. AI 시대일수록 인간의 판단과 책임은 더 큰 가치를 갖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정체성을 ‘직업’이 아닌 ‘역할’로 재정의해야 합니다.
직업은 사라질 수 있지만, 역할은 진화할 수 있습니다.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의미를 해석하는 사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설계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변신시켜야 합니다.

 

AI 시대는 인간을 몰락시키는 시대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인간, 변화하지 않는 인간을 가차 없이 도태시키는 시대입니다. 반대로 사고하고 기획하며 판단하는 인간에게는 과거 어느 때보다 큰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바람이 바뀔 때 어떤 이는 담을 쌓고, 어떤 이는 풍차를 만든다’는 중국 속담같이 AI라는 거대한 바람 앞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 선택이 개인의 미래를, 그리고 사회의 방향과 발전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상윤 하상윤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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