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의 삶으로 본 타인의 시선과 회복

  • 등록 2026.02.19 10:5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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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우리는 타인의 시선 속에 살고 있습니다. 타인의 기대와 평가가 때로는 우리를 성장시키지만, 어떤 순간에는 한 사람의 삶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러시아 후기 낭만주의의 거장 라흐마니노프(Sergei Vasilyevich Rachmaninoff, 1873-1943)의 삶은 그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림 1). 그는 러시아 노브고로드 지역에서 태어나, 말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생을 마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지휘자였습니다. 그의 음악은 흔히 ‘낭만주의의 언어’로 기억되지만, 그 인생을 관통하는 더 뚜렷한 줄기는 타인의 시선이 한 사람을 무너뜨릴 수도, 다시 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라흐마니노프의 경험을 ‘타인의 시선’ 이라는 렌즈로, 다섯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기대와 검증’의 시선입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어린 시절부터 재능 있는 소년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 시선은 곧 기대로 바뀌었고, 기대는 젊은 예술가에게 ‘증명해야 하는 과제’가 됩니다. 그는 17-18세 무렵, 이미 피아노 협주곡 1번(Op. 1)을 썼고, 자신이 단지 연주자가 아니라 작곡가임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이 작품은 지금 들어도 번뜩이는 패기가 느껴지지만, 동시에 젊은 작곡가가 사회적 시선과 기대 속에서 빠르게 결과물을 내놓아야 했던 압박감도 함께 담고 있습니다. 그는 이 단계에서 이미, 타인의 시선 속으로 자신의 음악을 던져 넣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뼈아픈 실패’ 입니다. 1897년, 20대 초반의 라흐마니노프에게 교향곡 1번의 초연 실패는 단순한 혹평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그는 작곡을 사실상 멈추게 되었고, 이후 그는 몇 년간 대규모 작품을 거의 쓰지 못할 정도로 심리적 붕괴와 우울을 겪었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패의 ‘객관적 크기’가 아니라, 실패가 남긴 내면의 상처입니다. 타인의 평가가 반복되면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밖의 말이 아니라 자기 안의 목소리로 바뀝니다. ‘이번엔 잘 안 됐다’가 아니라, ‘나는 안 되는 사람이다’라는 결론으로 넘어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실패가 뼈아픈 이유는 결과 때문만이 아니라, 한 개인의 정체성 자체를 흔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따뜻한 시선과 지지’입니다. 이 시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신경과 의사 니콜라이 달(Nikolai Vladimirovich Dahl)입니다. 그는 1900년 1월부터 4월까지 라흐마니노프를 거의 매일 만나며 최면치료(hypnotherapy)와 지지치료(supportive therapy)를 시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따뜻한 시선’은 단순한 감상적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인 임상적 행위입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만나고, 무너진 리듬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생활과 마음의 구조를 잡아주고, 불가능으로 굳어버린 믿음을 가능으로 천천히 되돌리는 과정이었습니다. 달은 라흐마니노프를 실패한 사람으로 고정하지 않았고, 회복 가능한 사람으로 대했습니다. 그 시선이야 말로 라흐마니노프에게 새로운 출발의 조건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네 번째 단계는 ‘치유와 복귀’입니다. 라흐마니노프는 1900년 6월부터 1901년 4월 사이에 피아노 협주곡 2번(C minor, Op. 18)을 작곡했고,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익히 들어본 곡일 것입니다. 그는 이 협주곡을 자신을 치료해 준 달에게 헌정했습니다. 협주곡 2번은 아름다운 선율로 유명하지만, 단지 감미로운 낭만에 머물지는 않습니다. 깊은 침체에서 빠져나오며 다시 삶의 리듬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 곡의 긴장과 해소, 구조의 흐름 속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달과의 치료 속에서 그는 ‘다시 작곡을 할 수 있다’는 감각을 조금씩 되찾았고, 그 감각이 작업을 지속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그는 단번에 완벽함을 되찾은 것이 아니라,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자신감을 회복하며 다시 쓰는 법을 되찾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협주곡 2번은 ‘기적’이라기 보다, 반복과 재구성이 만들어낸 ‘회복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성공과 지속’ 입니다. 성공은 한 번의 히트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이 되었을 때 비로소 안정됩니다. 라흐마니노프는 35-36세 무렵인 1909년 여름, 미국 첫 투어를 준비하는 시기에 피아노 협주곡 3번(D minor, Op. 30)을 작곡했고, 그해 11월 뉴욕에서 본인이 직접 초연했습니다. 협주곡 2번이 ‘복귀’라면, 3번은 ‘지속’ 입니다. 그는 다시 큰 구조를 설계하고 끝까지 실행하는 능력을 회복했음을, 그리고 그 회복이 일시적인 반짝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이야기는 음악가 개인의 성공담을 넘어, 우리 사회에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시선과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주변에서 ‘실패’라 규정되는 말을 듣고, 그 말을 스스로도 받아들이며 움츠러듭니다. 라흐마니노프 역시 같은 자리에서 무너졌지만, 누군가가 그를 실패한 사람으로 확정하지 않고 회복 가능한 존재로 바라보며 곁을 지켜 주었기에 그는 다시 쓸 수 있었습니다. 따뜻한 시선은 낙인을 지우고, 다시 시작할 문을 열어 줍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연희 경희치대 구강내과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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