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맛: 묘림 칼국수

  • 등록 2026.02.25 14:5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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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힘든 수술을 이겨낸 막내 누님이 지난 연말에 귀국하여, 8남매가 함께 묵으며 정담을 나누었다. 길 건너에 박정희대통령도 자주 묵었던 군인휴양소(現 스파텔)가 있으니, 추억의 라디움 온천 원탕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온천 하면 한적한 사우나보다 아이들이 꺅꺅대는 대중탕이 제격이다. 바글바글한 탕 한구석에서 오래간만에 보는 때밀이(洗身士)가 반가워, 동생과 나란히 몸을 맡겼다. 피부과 의사는 이태리 타올로 박박 문질러, 때가 떡가래처럼 밀려나오는 때밀이를 한사코 말린다.


떡가래 대부분이 실은 피부각화 층으로, 가벼운 찰과상이나 세균으로부터 내 몸을 지켜주는 보호막인데, 왜 쓸데없이 무장해제를 하느냐는 얘기다. 지당한 말씀이지만 아직 경험 못한 분은 한번 받아만 보시라.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진 느낌을 무슨 말로 설명할까? 깨끗한 상쾌감은 물론이요, 맨살을 손아귀로 강하게 주물러 혈액순환을 돕고 근육의 긴장을 풀어주는 효과에 더하여, 안마(按摩)를 통한 ‘기(氣)의 전달’이 분명히 느껴진다. 그래서 때밀이 10년이면 기가 쇄하여, 골병을 앓는다는 속설이 있는가보다.

 

휴일도 없던 개업 초기에는 두 시간이 채 못 되는 점심시간이 유일한 낙이었다.


혼밥에 적당한 식당을 찾다가 우연히 들린 허름한 ‘묘림 칼국수’에서, 이도 안 들어가게 쫄깃쫄깃한 면발에 깜짝 놀랐다. 면을 헹궈서 장국에 말아내지 않고, 멸치 넣고 그대로 끓여서 내니까, 구수한 밀 향기와 멸치 비린내가 잘 어우러진 충청도식 누룽국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다대기는 또 어떤가? 쫑쫑 썰은 풋고추에 멸치를 부스러뜨려 함께 섞은 다음, 자작할 만큼만 간장에 조려 꽤 큰 양재기에 담아준다.


한 숟가락 가득 퍼 넣어도 맵거나 짜지가 않고, 달콤 짭쪼롬한 국물이 입안 구석구석에 갈타운 뒷맛을 남긴다. 천천히 음미해보니 그냥 풋고추가 아니라 잘 익은 동치미에서 건진 집 고추다. 그래도 국수 하면 면인데 저 쫄깃함은 도대체 무슨 조화일까, 궁금증은 여전히 가시지를 않는다. 어느 날 근처 다방 마담에게서 드디어 수수께끼를 풀었다. 식당주인 부부는 20대 초반 대중탕에서 때밀이를 하면서 눈이 맞았고, 둘이 몇 년을 아끼고 모아 칼국수 장사를 시작했단다. 십대 시절부터 갈고닦은 손아귀심으로 주무르니까 반죽(Dough) 속의 기포(氣泡)가 자디잘게 부서져, 면발이 그토록 찰지고 양념이 골고루 배어드는 것이리라. 그러나 얼마를 못 가고 칼국수 집은 셔터를 내렸다. 먼저 부인이 시름시름 앓다가 병원에 입원하더니, 몹쓸 병으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 배달까지 1인 3역을 열심히 뛰던 주인의 그 후 소식은 모른다. 초년시절부터 너무 힘들게 일하고 기를 빼앗겨, 때 이른 50대 중반 고비를 넘기지 못한 게 아닐까? 서글서글한 눈동자에 미소가 선하던 고인의 명복을 빈다.


열심히 살았던 그 부부의 짧은 연(緣)이 못내 안타깝고, 쫄깃한 면 하며 폭 빠질 만큼 갈타웁던 집 고추 다대기의 정성어린 손맛이 다시 그립다.

 

몇 년 전 70대 막바지에 종합 진단을 받았다. 예상대로 유의미한 지표는 별로 없는데 묘하게 악력(握力)은 60대 초반이란다. 칭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고교시절 기계체조 경력에, 평생 치과의사로 지낸 덕분인 것만은 분명하다. 나이 들면 적당한 체중을 유지하라고 하는데, 결국은 언제 닥칠지 모를 응급사태를 이겨낼 기초 근육량을 말하는 것 같다. 재작년 3월 갑자기 쓰러졌던 응급사태 때에도 “이 환자의 체격으로 보아 분명히 회복할 것 같다”는 응급실 닥터의 말에 식구들은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고 한다. 치과의사들은 평생을 실내에서 앉은 자세로 환자를 본다.


영리한 젊은 치과의사들이야 알맞게 걷고 중량운동도 잘 하겠지만, 한 가지만 더 유념하자. 치과공포증에는 인체의 사령부인 머리와 신경이 집중된 얼굴 주변에서 진료가 일어나는 까닭도 크다. 기(基)를 전해 준다는 애정 어린 약손으로 접근하면, 환자도 이심전심 진료를 받아들일 마인드에 쉽게 다가 올 것이다. 기를 빼앗긴다는 걱정일랑 하지도 말자. 상호 교감은 오히려 기를 북돋아주는 법이니까.

 

*혹시 모를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칼국수 집 옥호(屋號)를 조금 바꿨습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임철중 치협 대의원총회 전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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