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1번째
해남의 추억
정 진 한
대한공중보건의사협의회 부회장
해남군 북일면 보건지소 공보의
2만4천번대의 면허번호를 부여받고 치과의사로서의 첫 임무를 부여받은 것은 전남 해남군 북일면 보건지소의 공중보건의사였다. 내가 공중보건의사가 되는 그 해부터 random 배치, 소위 요즘 ‘1박2일’에서 유행하는 복불복식 배치였기 때문에 필자의 경우에는 전국에서 손꼽히게 운이 없었던 경우라 할 수 있다. 모두의 기피지역인 전남에 가게 된 것도 충격이었는데, (발표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취하질 않았던 것 같다.) 전남도청에서도 60명중 53번째를 뽑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TV예능프로처럼 매운 닭꼬치나 까나리 액젓을 먹으라면 1박2일을 먹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100% 리얼 실제 상황이었다. 친구들은 이런 나를 “똥손”이라 불렀다.
스스로 명명한 배치참사(配置參事)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이틀 뒤, 친구들의 동정과 아직도 시험 배치로 기억하는 몇몇 지인들에게 “올해는 랜덤인거 아시죠?”라는 변명 아닌 변명을 뒤로하고, 생면부지의 해남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이삿짐을 정리하고 난 뒤, 청소할 때 나온 뱀허물에 놀라셨던지 아들을 남겨두고 돌아가시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다.
집에서 7시간 정도 걸리는 북일면은 전남도립 공원인 두륜산이 한눈에 보이는 아주 깨끗하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서울 가는 길에 매번 그 산을 넘지 않아도 되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두륜산을 사랑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지소 바로 옆에는 dense한 거름 냄새 물씬 나는 논이 펼쳐져 있었고 10분만 가면 남해 바다와 완도로 향하는 검문소도 있었다.
다행히 함께 일하게 된 치과 여사님과 방문 여사님께서 아주 좋으신 분들이었기에 그나마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는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치과 여사님은 요리에 관심이 많으셔서 아침에는 토스트 혹은 직접 구운 빵도 가져다 주시곤 하셨다.
하지만 pm 6시 이후 모두가 퇴근하고 난 뒤로는 허허벌판 위에 30년 인고의 시간을 견디다 못해 이제는 지반침하로 그 운명을 다해가는 지소 건물에 홀로 남겨졌다. 의과 선생님은 읍에 원룸을 얻어 사셨지만 나는 그럴만한 자금 여유가 없었다. 가끔 지소 앞에 찾아오는 흰색 발발이 ‘복길이’나 동거하던 개미, 거미, 그리고 비올 때 방안에 들어오던 개구리가 유일한 친구였다.
물에서는 알 수 없는 녹물이 흘러 나왔다. 밥은 두륜산에서 떠오는 약수물로 대신했지만 씻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일주일에 한 번 수요일 읍에 나가 대중탕에서 목욕을 하고 군청 옆 ‘곰이네’에 가서 돈가스 정식으로 잠시나마 도시인의 정취를 느껴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자 위안이었다. 돌아와서는 늘 술 한잔 혼자 기울이고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랬던 해남에서의 생활과 안녕을 고한지도 어느덧 1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공중보건의 부대표를 맡으며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어보고자 했는데 여러 환경적 제약과 행정적인 벽에 부딪혀 많은 가시적인 성과물을 얻어 내지 못했다. 물론 초심을 잊고 나태해졌던 내 자신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겠지만….
지금 현재도 많은 공보의들이 행정편의주의적 배치 방식과 대체 복무라는 미명 하에 기본적인 지원도 받지 못하고, 본 거주지와 너무도 멀리 떨어진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 남모를 고생을 하고 있다. 하루아침에 이러한 부당함이 모두 사라지기는 힘들겠지만 차기 대한공중보건의사 대표단과 뜻 있는 분들의 노력으로 차차 변화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필자 역시 한 해 동안의 시행착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은 도움이나마 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마지막으로 상대적 박탈감에 오늘도 바다를 바라보고 힘들어 하고 있을 완도 노화도의 한 공중보건의사에게 본인의 경험담이 담긴 이 글로 심심한 위로를 대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