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7번째
모든 것은 다르다
박태관
서울 한솔치과의원 원장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고 또 그에 따라서 선악, 장단, 미추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즉 세상에는 모든 것이 각자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사유에 의해서 비교하면서 양극단의 가치의 세계를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것들에 빠져들어 그 속에서 희노애락의 파도에 허우적거리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부자인 것 같았는데 친구와 비교하고 나서는 순식간에 빈자가 되고 내가 잘 생긴 것 같았는데 딴 사람을 보니 자신감이 없어진다.
그러면 변치않는 어떤 기준이 있을까? 옛날의 미인이 오늘날의 미인과 같을까? 아프리카에서의 아름다움이 우리나라의 아름다움과 동일할까? 유명한 화가의 느낌은 모든 사람에게 같아야 되나? 이런 비교의 문제들은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생기는 일시적인 거품이거늘 우리는 여기에 모든 인생을 걸고 어둠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학의 긴 다리는 긴 것으로 아름답고 오리의 짧은 다리는 짧은 것으로 아름답다. 학의 다리가 길어 보인다고 자를 순 없다. 여자는 여자로서 아름답고 남자는 남자로서 아름답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의 잣대를 만들어 남녀간에 부부사이에 또한 모든 사람들을 비교 평가함으로써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비교하지 않으면 걱정이 들어올 틈이 없다.(哀樂不能入也)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때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어울림이 찾아온다. 부부유별(夫婦有別)은 서로 다르게 존재하는것 즉 구별을 의미하는 것이지 차별(次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별은 사실의 개념이요, 차별은 가치의 개념이다. “이것은 꽃이다”라는 것은 사실이요 객관이며, “이 꽃은 아름답다”는 가치의 개념으로 주관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의 주관적인 판단을 객관화 시켜 불화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같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같은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해결하기 위한 가정인 것이다. 가령 과학에서의 법칙도 같은 결과가 나올 수가 없다. 매번 다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한 순간도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결과가 우리의 인식 수준에서는 무시해도 될 만한 것이든지, 아니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가기 때문이지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즉 같다고 보는 것은 사실이 아닌 개념상의 문제인 것이다.
서양의 철학은 같은 것, 동일한 것을 찾아온 역사이다.
그러다 보니 실제의 세계보단 형이상학적 세계에 들어 갈 수밖에 없다. 형이상학적 세계는 시간이 배제된 공간의 철학이다. 서양에서 종교와 철학은 다른 것을 인정치 않는 경향이 있어서 자연히 이단사상이나 투쟁사상이 나올 수밖에 없다. 동양에서는 이단사상이 없으나 유교 그 중에서 주자학은 절대적인 사상 이단사상이 있기 때문에 투쟁적일 수밖에 없다. 나만 옳다고 하는것, 내 생각이 진리라고 하는 고집에 빠져 있을때 남녀, 부부, 부자, 동서양, 자연과의 모든 관계는 단절될 수밖에 없으며 관계가 끊어지면 파멸이 올 수밖에 없다.
상대를 변화 시켜서 나에게 종속시키는 화합(化合)이 아니라 서로간에 다르게 존재하는 독립성을 유지시켜 주는 화합(和合)을 해야 한다. 피아노는 피아노 답고 바이올린은 바이올린다울때 아름다운 화음이 울려퍼진다. 바이올린이 피아노를 흉내낼 순 없지 않을까?
다른 것을 인정해야 서로서로 공존할 수 있다. 그래야만 모든 관계에서 소통이 이뤄진다. 다른 것을 같게 만들려고 할때 가정에서, 병원에서, 국가간에서 또한 자연과의 관계에서 재앙이 올 수밖에 없다. 현재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국가간의 전쟁이나 인류의 종말을 앞당기고 있는 환경의 문제를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존재하는 것은 서로 다르고 계속 변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하면 자기 생각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모임에서도 대화와 타협이 가능해 진다. 그러나 대부분이 자기가 배우고 경험한 일부분을 가지고 주위의 환경을 바꾸려고 할때 본인의 고통은 물론이고 주위의 관계도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것은 특히 전문가 집단이라고 하는 의사, 변호사, 교수등에서 심하게 나타난다. 자기 생각과 논리로 성벽을 쌓아 놓고 무너질까 두려워 전전긍긍하고 있다. 머물러 있다는 것은 경직화 됨을 말하는 것이요, 굳는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육체는 아직 죽지 않았으나 정신은 이미 굳어져 죽은자에 가깝다. 부드럽고 유연한 사고는 상대방을 인정하고 나의 주관성에 빠지지 않을때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계속 변화하는 이 실상의 세계에서 변화하지 않으려는 것은 어지러울 수밖에 없고 두려울 수밖에 없다.
변화의 흐름에 같이 할때 환자와의 관계, 직원과의 대화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도 고통보단 편안함이 찾아 오지 않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