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해외진료봉사를 다녀와서 (2)
열치봉사자 손발 척척
<1963호에 이어 계속>
인니에서 진료 첫째 날 (7월 30일 토요일)
몇 시간 못 잤지만, 설레임도 있고 공기도 좋아서 인지, 아님 시차 때문인지 그리 피곤하지는 않다. 1층의 식당으로 내려가니 한식으로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한국인지 인니인지, 이곳에 와서 북어국에 김치를 반찬삼아 식사를 할 수 있다니 너무 황송할 따름이다. 어젯밤에-새벽이라 시간이 늦어-설치하지 못했던 장비들이 걱정되었다. 7시40분 진료장소로 이동해 장비들을 풀고 설치하는데 1년만이라 처음엔 약간 어색했는데 금세 뚝딱 뚝딱 이동식 진료장비와 체어들을 설치하고, 재료들을 정리하고, 여러 사람들이 달려드니 금방이다. 역시 열치봉사자들이다.
힘찬 구호와 함께 8시20분부터 예상시간보다 빨리 환자들을 진료하기 시작했다. 더운 나라의 특성상 이 곳 사람들은 7시부터 출근해서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이미 환자들이 대기 중이었다. 치과진료실 사람들이 분주히 왔다 갔다 한다. 그러나 왠지 어수선하다. 서로의 동선이 겹쳐서 이동이 힘들고, 재료를 찾는 목소리가 집중력을 떨어트린다. 통역을 통한 환자와의 대화도 어렵다. 어설픈 인도네시아어를 써보려고 해도 엄두가 안 난다.
환자들은 구강상태가 심각하다. 대부분의 치아들이 충치에 이환돼 있고 결손치도 많다. 치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 발치하랴, 스케일링 하랴, 신경치료 하랴, 레진 충전하느라 정신이 없다. 손에 낀 글러브를 타고 연신 땀이 흘러 팔꿈치을 타고 바지로 뚝뚝 떨어진다. 정신이 없다. 한참이 지나서야 조금씩 정신이 들고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다. ‘Selamat datang.(어서오세요) Silakan duduk(앉으세요)’ 공부했던 인니말도 하나씩 생각난다. 조금씩 적응하고 나니 진료가 조금씩 빨라진다.
자리가 비좁다고 김문호 사장님이 당신 방까지 예진실과 TBI을 위한 방으로 기꺼이 내어주신다. 신고문님이 심각한 환자 상태대문에 진단을 내리기 어려워 옆방의 나를 자꾸 부르신다. 그곳에서 장은정, 양유미 선생이 양치질 교육 시키고, 진단이 끝난 환자를 옆방으로 인도하느라 바쁘다.
옆방에서는 김순임 선생을 주축으로 이미영, 장명혜 선생이 서투른 손 놀림이지만 준비해온 피부미용과 네일 케어 타투 등을 해주고 있었는데, 세계 어느 곳과 다를 바 없이 역시 여자들에게 인기 최고이다.
그 옆방에서는 이수백 명예회장님의 지도하에 고득남 선생과 기공사 여러분들이 무료틀니 환자들의 인상채득에 한창이다. 오전을 그렇게 50명 넘게 진료하다보니 벌서 점심시간이다. 큰일이다! 3일 동안 예약환자가 320명이 넘고 마지막 날은 진료시간이 짧으니 오전에 60명을 넘게 봤어야 했는데 목표 미달이다. 오후에는 더욱 분발해야겠다.
열악한 의료 환경과 불량한
구강위생
오전 진료 후 중식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업무 파트를 나누고, 진료위치도 약간 변화시켜 일반 의자를 이용한 발치 장소를 만들어 효율성을 높이기로 했다. 진료의 내용이 거의 발치가 많기 때문이다. 환자들의 구강상태를 보면 치아우식증이 다수로 존재하고, 치석은 모든 치아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치료의 흔적은 열에 하나 찾기도 힘들다. 어쩌다 보는 임시틀니 형식의 보철물은 기능도 못하는 처참한 상황이다.
처음에 이곳으로 봉사진료를 오기로 하면서 약간은 망설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인도네시아(1인당 GDP:3015$)는 기존의 캄보디아(1인당 GDP:814$)나 필리핀(1인당 GDP:2007$) 베트남(1인당 GDP1174$) 등의 해외진료지 보다는 잘사는 편에 드는 나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인도네시아는 32년간의 수하르트 독재기간 동안 2억5천만이라는 대 인구 속에서도 전 인구의 7%를 넘지 않는 중국 화교들이 인도네시아 전 자본의 80%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자본은 다시 수하르트를 정점으로 하는 일부 지역 출신의 권력과 결탁되어 있었고, 1998년 수하르트 퇴진 이후에도 유도요노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으나 부정부패가 만연해 전 국민의 13.3%가 극빈층으로 전락된 상태이다. 자카르타의 최저임금이 110$ 정도이고, 다다현지 공장의 직원들의 월급이 14~17만원 정도 인데, 치과진료비는 비보험이라 치료를 받으려면 한 달 월급이 날라 간다고 하니, 어지간하면 참고 살고 치료받을 엄두도 못 낸다고 한다.
이곳에서의 발치는 상당히 어렵다. 치근의 길이는 평균적으로 한국인보다 얼추 2~3mm가 길며 치근형태도 다리를 벌린 모양이고, 치조골까지 단단해 치관에 충치까지 있으면 분리발치를 해야 되는 경우도 많다. 여기서 발치를 며칠만 하면 발치의 고수가 되겠다.
한쪽 진료의자에서 맏언니 박종희 선생이 홀로 치석과 고군분투하고 있고, 그 옆에선 장희수 재무이사가 한국에서도 잘 안하는 즉발근충에 레진충전으로 마무리하는 고급진료를 하고 있다. 환자보는 속도가 빨라지고 환자가 많아지자 다들 조금씩 지처간다. 어느 새인가 자기가 하던일이 한가한 틈을 이용해, 옆방에서 일하던 천사들이 합류해서 진료에 동참한다. 전우애가 따로없다.
옆방의 피부미용은 인기 만점이다. 에어컨도 안 나오는 방에서 서투른 손놀림으로 마치 전문가인냥, 능숙하게 얼굴 마사지를 열심히 하고 있다. 다만 옆방의 틀니 환자들만 나름 목표량에 비해 한가한 편이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돈을 내야 되는 줄 알고 틀니 만들어주겠다는 걸 극구 사양하다가 무료봉사라는 것을 알고 연신 고맙다는 합장을 하는 이도 있었다. 회사밖에도 홍보를 좀 했어야 했는데 아쉽다.
이렇게 첫날의 진료가 힘들지만 즐겁게, 보람차지만 아쉬움을 남기고 지나가고 있다.
인니에서 한민족를 만나다
첫날 진료는 항상 어렵다. 적응하며 땀 흘리다보면 하루가 금방 가버린다. 다른 역대의 해외진료지에 비하면 한국인 직원분이 통역도 해주고 현지인 직원분이 청소도 도와주고, 에어컨도 있고 진료장소가 환자들 때문에 비좁고 공장건물이라 오후가 되면 지붕 복사열로 실내가 섭씨 28도까지 올라가지만 천국이다. 다다 사장님께서 하루 종일 고생했다고 삼겹살에 랍스터(인도네시아산은 속살이 적다)로 파티를 열어 주신단다. 같이 고생한 직원들과 맥주와 소주한잔 기울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30여명의 직원 가운데 중국동포들이 12명이나 된단다. 이들은 원래 싸이판 봉제공장에서 일하다가 그곳이 폐쇄되면서 이곳으로 3년 전에 다시 이주해왔다고 한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40세정도로 벌써 12년째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으니 해외에서 젊음을 다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강인한 민족적인 생활력이 느껴진다. 다른 땅에서 태어나서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건만, 술 한 잔이 들어가니 민족적 동질성이 느껴지는지 누가 먼저냐 할 것 없이 흥겨운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큰일이다! 과음하면 안 되는데! 반가움에 벌써 취기가 오른다. 그렇게 인니에서의 민족상봉의 밤은 깊어간다.
<다음호에 계속>
김민재
열린치과의사회 진료봉사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