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인 구하기

  • 등록 2013.03.0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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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인 구하기


위고의‘레미제라블’을 읽으면 명작소설은 “거대담론의 예술적 번안”이라는 말이 과연 명언임을 새삼 깨닫는다. 좀 더 직설적인‘이방인’이나‘어린 왕자’도 있지만…  우리의 소설가들 중에 이런 경지에 근접한 분들을 들자면‘등신불’의 김동리나 이문열씨 등 다섯 손가락 쯤 꼽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재치 있는 이야기꾼(Story Teller)이나 장르작가들을 낮추어 본다는 뜻은 아니다. 어느 분야건 다양성은 필수조건이요, 저변(底邊)은 넓을수록 안정성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인물난은 시인 중에 더 심한데 딱 한 분이 돋보인다. “우리 시단(詩壇) 백년사에 위대한 시인은 없다”고 일갈한 고 김춘수 시인이다. 인간성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울어난 큰 시가 없다는 뜻이요, 그런 의미에서 1950년대에 쓴‘꽃’이야말로 존재와 소통이라는 거대담론에 가장 가까이 다가 간 큰 시가 아닌가 한다. 


훌륭한 시인은 한 시대에 한 사람으로 족하다며 당당했던 그가, 말도 꺼내기 싫은 부끄러움을 토로한 바 있다. “나는 정말 후회합니더. 국회의원 한 거 말이요!” 80년대에 강압에 의해 떠맡았던 전국구 의원직 얘기다.


시인이 진통 끝에 고르거나 빚어낸 시어 한 마디는 새로운 생명력을 갖는다.


안도현 시인이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라고 외친 이후,‘연탄’이 우리 가슴에 와 닿는 의미가 달라졌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그 시인이 문재인 후보를 위해 “한 번 뜨거운 사람”이 되었다.  공동선대위원장으로서 그가 보여준 언변(言辯)에는 거침이 없었다. 단일화과정에서 민주당에 실망했다는 김영환 의원의 말에 “뻘짓 그만하시고 차라리 쥐구멍에 들어가라”라든가,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김지하 시인에게 “90년대 이후 문학적 긴장을 많이 잃어버린 분이며 앞으로 노래‘타는 목마름으로’는 못 부를 것 같다”는 반응 등….


“부모가 모두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뭔가 다르지 않겠는가”라는 김지하의 말에는 “왜 총에 맞아 죽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받아쳤다. 그렇게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였다는 개인적인 판단은 자유지만, 주어를 슬쩍 뒤바꾼 교묘한 말장난은 정직하지 못하다. 졸지에 부모를 잃은 자식의 슬픔과 죽은 부모의 잘못된 과거를 뒤섞어, 그 잘못의 아우라까지 자식에게 덮어씌운 야바위식 수법이다. 연일 수천 번의 악수로 손이 아파 파스를 붙인 박 후보에게 “연민을 자극하는 상처 마케팅”이라든가, “그녀, 잘 가꾼 악(惡)의 얼굴이여!”라는 영탄은, 막장드라마에서도 접하기 힘든 모진 저주다. 비수처럼 가슴을 찌르는 독설은 젖과 꿀을 토해내던 바로 그 시인의 입에서 나온 것이기에 더욱 큰 충격이었다.


시인은 천둥벌거숭이의 순수함과 해맑은 천진무구함에서 생명력을 얻는다. 


그것은 전문직업인 출신의 정치인이면서도 놓치지 않고 지켜온 김영환 시인의 정직성에 살아있고, 한쪽으로 치우쳤던 자신에 대한 회한과 가장으로서 부실했던 죄책감에 북받친 김지하 시인의 어린애 같은 투정 속에 담겨 있다. 안도현 시인은 생물학적 내지 정신 연령에서 아직은 두 시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지 모르나, 시인으로서의 순수함은 잃지 않았다고 본다. 순수한 만큼 감정이 격앙되면 욱! 하고 흥분하기 쉬운 법이요, 선거 막바지의 불꽃 튀는 현장은 보통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흥분의 도가니, 바로 전쟁터다. 그러므로 두 선배시인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가 앞선다면, 그동안의 막말과 독설은 전쟁터의 열기로 치부해 넘어갈 수 있고, 전 국민을 품어야 할 박근혜 대통령은 말할 나위가 없다. “No hard feelings!” 이왕 발을 들인 길에 죽~ 정치인으로 가겠다면 그 또한 안씨의 선택이요 자유다.


다만 한 가지. 그의 시집을 읽으면서 때로는 숙연하고 때로는 감격했던 필자에게 정치인 안도현은,“Virginity lost, Innocence over, Poet no more!”가 될 것이고, 뽑아버린 그의 시집은 다시는 서가(書架)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위대한 시인”의 유력한 후보 명단에서도 그 이름을 지우게 되리라. 시인은 영원한 종신직이요, 시인의 외도(外道)는 한 번으로도 지나친 법이니까. 


임철중
·전 치협 대의원총회 의장
·대전문화예술의전당 후원 회장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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