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수필" 당선작 ■ 제1494번째 이야기 [농사와 진료]

  • 등록 2009.12.3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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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수필’ 당선작   ■ 제1494번째 이야기 / 11월 2일 게재

 

농사와 진료

 

상큼한 흙냄새를 맡고 싶어서 한참 동안 밭에 엎드려 호미질을 하다 문득 앞산의 낙엽송 나뭇가지위에서 몇 마리 왜가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고 푸드득 날아가는 소리에 허리를 펴고 이리저리 둘러보니 어느새 정상에 있었던 운무가 서서히 밀려 내려 오고 계곡 바람이 심심찮게 귓가를 스치며 지나간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치열했던 공간과 시간의 치열함의 끈이 느슨해진 것에 적잖이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이런 호사스런 여유를 이제 누리는 것도 점점 익숙해진다.
아마도 내일이나 모레쯤 비가 올 것 같은 조짐이란 느낌이 들자, 이번 가을에 심을 알타리 무는 작년보다 적기에 심을 것 같다는 생각에 농부처럼 마음이 흐뭇해졌다. 모종보다는 파종이 수확을 위해 시기와 날씨가 아주 중요하다.

 

 옛부터 훌륭한 농부는 손바닥을 펴 바람을 느끼며 파종할 시기를 알아보았다고 했는데, 얼추 하는 짓이 이리저리 눈치로 감 잡고 하는 게 아직도 사이비 농사꾼이 틀림없는 것 같다.
이제 밤이슬 오기 전에 서둘러 로타리 마무리하고 파종하는 게 밭의 작업보다 마음의 호미질이 더 바빠졌다. 옆에서 난 인기척에 놀라 뒤돌아보니 마을 농사꾼 털보 노총각이 어느새 이리저리 눈짓으로 내가 해놓은 작업평가를 이미 다 끝내고 얼굴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며 “농사가 뭐 그리 재미있소?” 이 말로 내 기를 먼저 팍 죽이고 내 손에 호미를 훔쳐 가더니 손수 시범을 보이기 시작한다. 고랑과 고랑사이는 큰 발걸음 간격으로 하고 파종 간격 구멍을 손 뼘 하나 사이로 해야 하며 씨앗을 심을 때는 한 구멍에 3개씩- 하나는 하늘의 새를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땅속의 벌레,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사람을 위한 것.- 심고 흙은 씨앗부피의 3배로 높이고 덮어야 하고… 난 담임선생님의 훈시를 듣는 어린 학생처럼 다소곳이 따라가면서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존재를 인정해 준다.
신이 난 그 총각은 연신 온몸에 땀이 뒤범벅이 되어 몸짓, 말짓으로 가르쳐 주다 보니 내가 할 일이 어느새 쌈밥 먹는 입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버렸다. 계면쩍기도 하고 멋쩍어 나도 서둘러 씨앗을 조심스럽게 평가를 받을 양으로 심기 시작했다.

 

어느새 농사꾼이 보면 사이비 농사일이라 할 수 있는 일을 해온 지가 네 번째 해가 다 되어 간다. 가끔은 내가 왜 이 힘든 농사일을 시작했을까 하는 생각이 내 마음의 벽을 두드린다.
득 진료실에서 생활이 내 인생의 전부인양, 살아온 세월이 흐르는 물위에 낙엽이 정신없이 떠내려가는 것처럼, 시간에 좇기고 환자에 좇기고 이런저런 일에 휘둘려 세월이 나를 좇아오는 게 아니라, 시간을 좇아 허겁지겁 살아 온 나를 뒤돌아보게 한다.


 이 세상의 일이란 수많은 세계관, 직업관, 가치관, 경제관, 종교관이 교차하면서 돌아간다. 옛날 중국 춘추전국시대 이전에 인간됨이란 조화로운 인간을 뜻하였다. 다시 말해서 농사일도 잘하고, 붓글씨도 잘 쓰고 사냥을 위해 말도 잘 타고, 화살도 잘 쏘는 그런 자연을 누리는 균형 잡힌 인간을 지향했다. 그런데 부국강병의 논리에 가치관을 우선시 하는 시대에 들어서서는 소위 전문성이라 할 수 있는 개념의 효율성의 극대화라는 이점 때문에, 각각의 일들을 분리시켜 농사일만 하는 사람은 농사일에, 말 타는 사람은 말 타는 일만, 붓글씨 잘 쓰는 사람은 붓글씨 쓰는 일에만 매달리게 만들었다. 즉, 균형 잡힌 인간이 요구되는 게 아니고, 한 가지 일만 잘해도 되는 편식에 치우치는 불균형적인 인간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의 극대이익이 요구되는 시점에 전환되어 온 시대 효율성 논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돼 왔다.

 

하지만 인간 본연의 자아에는 균형 잡힌 인간에 대한 욕구가 꿈틀거리면서 에워싸인 마음의 벽에 충돌이 일어난다. 경쟁을 통해 승자의 포식을 누리는 여유보다 존재의 평화를 누리길 원하고, 존재의 여유를 즐기기 원하고, 너와 내가 바람과 태양과 별들과 어우러지는 조화 속에서 살아왔던 역사속의 내 몸 안의 유전자를 잊어버리기엔 근대화 시간이 너무 짧지 않는가 싶다. 땅을 일구어 생명의 근본인 먹거리를 생산해 낸다는 게 생의 근본임을 존중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 농사 행위에 철학, 종교, 제도, 천문, 경제, 사상의 모든 형이적인 상학, 하학의 개념이 집약돼 녹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새가 높이 날더라도 결국은 나뭇가지에 앉을 수밖에 없겠지만, 어느덧 생각이 너무 멀리 날아가 버린 것 같다.

 

 그러나 거품을 빼고 인색하게나 말할 수 있는 것은 농사가 단지 농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인간의 참 나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안 끝났소?”라는 소리에 방랑하던 이 생각 저 생각이 고랑 매던 밭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여기 와서 참 매운탕에 소주 한잔 합시다” 다 먹을라고 한 짓거리니까… 웬 매운탕? 언제?
아마도 올라 올 때 준비해 온 것이 틀림없다. 어느새 개울가에서 솔솔~ 솔 냄새와 함께 창공을 머리 뒤로 하고 나뭇가지에 앉아 절실히 벌레를 찾는 새처럼, 현실적인 매운탕 냄새가 내 몸을 자극한다. 본능적으로 한걸음에 뛰어나가 옆 고랑 고추 밭에 싱싱한 어린 파란 고추 몇 개를 벌써 손에 훔치고 있었다.

 

 

농사가 단지 농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인간의 참 나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당/선/소/감

 

오 광 주

인 치과의원 원장

 

“입상 소식에 어린시절로 돌아간 느낌”

 

어린 학창시절 글짓기 대회에서 입상한 후 처음으로 상을 타게 되었다는 소식에 약간은 계면쩍기도 하고 한편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 간 느낌이 든다.
뒤돌아보면 어렸을 때 세상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첫 기억을 사람들마다 가지고 있겠지만, 나의 첫 추억으로는  시골 동네 친구들, 형들과 개울가에서 정신없이 가재잡고 놀 때 허리를 펴고 엉글어진 개울가 숲 나뭇가지 사이로 보여진 파란 진짜로 새파란 하늘을 쳐다본 기억으로 새록새록 다가온다. 그 때  갑자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는데, 그 후로 그 하늘의 색깔이 나에게 세상의 색깔이 되었다. 세상을 향해 엉금엉금 나왔을 때, 항상 그 파란 색깔을 통해 나의 삶은 흥분되고 기대되기도 한 세월로 남았다.


그런데 언제가 부터 그 파란 색깔이 옅여지더니 이제는 그 기억마저도 가물가물 거린다. 내 삶이 주변으로 다가오는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하루하루 더듬더듬 걸어가고 있는 내 자신에게 내가 묻는다. 파란 하늘 어디 있느냐고…
사회가 개인주의화, 구조적 분화화, 문화 다원주의화, 자본주의화로 발전 되면서 이제 사람들은 질주하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꼴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내릴 수도 없잖는가? 가보는 데까지 가 보는 거다. 


이렇게 다급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그 색깔을 음미한다는 것은 아직은 덜 자랐다는 것을 의미 할지도 모른다.
허나 효율성과 기능성을 헤아려 보는 게 익숙한 우리들의 태도는 본래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게다.
그렇다면 우리들 가슴을 마냥 울렁거리게 만들었던 그 색깔은 무엇인가?
거창하게 농사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어느덧 그 흉을 낸지가 5년이 다 되어간다.


우리는 이제 통섭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기 세계만이 아닌 다른 세계를 슬쩍 넘보는 재미도 생각보다 쏠쏠하다.  젊은 시절 그 파란 색깔을 찾으러 한참 싸돌아다니다가  지쳐 되돌아 올 때, 내가 있는 본래 그 자리에 그 색깔이 있었다.
작문이라고는 정식 수업을 받아 본적이 없는 나에게 이런 상을 주신 치의신보 집필진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오 광 주 인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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