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 여송 이영옥 선생님을 추모하면서

  • 등록 2014.03.04 13: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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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

지난 2월 24일 선생님의 부음을 듣고 망연자실하였습니다. 2개월 전에 문안드리고 뵈었을 때만 해도 노구를 이끌고 나오셔서 좀 힘들어 하셨으나 정신력은 청정(淸淨)하시어 장수를 기원하면서 작별 인사를 드렸는데 말입니다.

우리들의 스승이신 이영옥(李永玉) 선생님!

선생님은 진정 저희들의 정신적인 사표셨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모범을 보여주신 하나의 귀감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18년 부유한 가정의 선각자 집안에서 태어나시어 총명한 정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청주고보와 1941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경치전)을 졸업하시고, 일찍이 선생님의 은사이신 정보라 박사에게서 미국식 신 치과 의학기술을 전수 받으시고, 1946년 현재의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서 전임강사로 시작하시어 어려웠던 민족의 수난 6.25 동란 중에 구사일생으로 납북을 모면하시고, 1954년 미국 유학을 가셨습니다.

그때는 전쟁수복 직후였고, 미국 인디아나 치과대학에서 유명한 보철학의 저자 존스턴 교수에게서 지도를 받으시며 대학을 졸업하시고, 1957년 유학에서 귀국하시어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몸담으시고 치과대학 부속병원장, 학장을 맡으시고 후학 양성에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돌이켜보면 당시 한국 치과의학계는 일본의 강점기에 이은 6.25 동란으로 불모지와 다름없었습니다.

# 한국치과 보철학의 선구자
선생님은 이러한 원시불모지에 미국식 서양 신학문과 기술 그리고 발달된 의료재료와 기계들을 도입하여 원시세계에서 신세계로 도약하는데 기초를 닦고 한국 치과 보철학 학문을 정립하고 이끌어 주신 한국 치과계의 선구자 이셨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6.25 동란의 불모지에서 치과 보철 인상작업은 석고(Plaster of Paris) 인상재를 사용하여 경화 후 두,세 조각을 내서 맞추는 정도였는데 동란 후 선생님께서 도미유학 후 도입하신 신학문과 기술 그리고 알지네이트, 하이드로 코로이드(아갈) 인상재의 사용은 치과 보철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회고하건대 현재 한국사회에서 70세 이상 치과의사 대부분은 선생님의 치과 보철학 강의를 기억하고 그리워하지 않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강의는 항상 간결하고 명료하며, 똑소리나는 정의만을 정리해 주셨습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준비해서 강의를 해주셨기 때문에 선생님 수업시간은 늘 긴장하고 정신이 집중되는 시간 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련의 실습 중에 보여주시는 선생님의 ‘왁스카빙(WAX-CARVING)’ 솜씨는 잠깐 동안에 신기에 가깝게 작품이 생동감 있게 나타나서 속으로 감탄하곤 했습니다.

제가 떠오르는 추억 중에서 에피소드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962년 제가 치과대학 3학년 늦은 봄날 금요일 오후였습니다. 학생회장 선거운동이니 해서 급우들이 들뜬 기분으로 선생님의 보철학 실습시간을 빼먹고 싶어해, 급우들이 제시간에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일부는 뺑소니 치고, 일부는 밖에서 웅성거리는데 한 20분쯤 지나서 선생님이 흰 가운 차림으로 나오셔서 “너희들 어디보자, 학교를 졸업 할 수 있는지? 학점을 주나 보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학문 열정을 알게 해주신 분
그 당시 총대를 맡고 있던 저는 정신이 번쩍 들어 선생님 방에 찾아가 “제가 잘못 인도 하였습니다. 다 제 책임입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하고 사과 드렸더니 선생님은 노여움을 삭이시고 “너희들 부모님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시골 논, 밭, 황소 팔고 공부시키는데 그러면 되겠느냐?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해야지!”라고 말씀하셨지요. 정신을 번쩍 깨우는 훈계였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학문에 열정적이고 적극적이신 선생님을 평생 잊지 않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근엄하시고 비교적 말씀이 적어 저희들은 선생님을 대할 때 항상 조심스러웠습니다.선생님께서는 해방 후 한국 보철학 발전을 위하여 25년간 학교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시고 대한치과보철학회를 창립하셨으며, 처음으로 아세아 태평양 치과학회를 한국에서 개최하는 준비위원장을 맡으셨습니다. 후학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학교를 은퇴하신 후 1971년부터 1996년까지 25년간은 사회에서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장으로서 활동하시며 세계 40개국 100여개 도시의 치과계를 순방하시고, 강연활동에 왕성하게 참여 하셨습니다.

# 스승님의 그리움은 강물처럼
슬하에 서른한 분의 자손이 번성하고 계시며, 이제 만 96세의 천수를 누리시고 영면 하셨으니 인간으로서는 다복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기독교 가문에서 출생하시고, 저녁시간이면 항상 성경을 읽으며 그리스도 하느님의 진리를 탐구하시던 모습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늙게 되면 귀천(歸天)하는 것이 숙명이지만, 인생의 젊은시절 총명했던 두뇌로 신학문을 답습 개척하고, 불모지와 같았던 원시 학문의 세계를 서구식 신세계로 발전시킨 토대를 마련한 분으로서, 그 찬란했던 학문의 지식을 이제 접어 두어야하는 안타까움에 망연할 뿐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스승님과 같은 분을 다시 뵈올 수 있을지, 그리움은 강물처럼….
이제 평안히 영면하소서, 천상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소서.

끝으로 선생님의 영전에 성경의 시편 23편, 다윗의 시를 받치려 합니다. 또 유족에게는 William Wordsworth의 시 Splendor in the glass의 한 구절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구창서 원장(구창서치과의원)


다윗의 시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이름을 위하여 정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어두운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니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로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는 도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잔치상을 차려주시고
내 머리에 향유를 부으셔 축복해 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진실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사랑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에 영원히 살 것입니다.


Splendor in the Glass  
                    By William wordsworth

What though the radiance which was once so bright
Be now for ever taken from my sight,
Though nothing can bring back the hour
Of splendor in the glass, of glory in the flower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In the soothing thoughts that spring
Out of human suffering…
In years that bring the philosophic mind.


초원의 빛

한때는 그렇게도 밝았던 광채가
이제 영원히 사라진다 해도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때 그 시절을 다시 돌이킬수 없다 해도,
우리는 슬퍼하기보다 차라리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
인간의 고통에서 솟아 나오는
마음에 위안을 주는 생각과
사색을 가져오는 세월의 흐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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