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게 때때로 힘들게 느껴질때가 있다. 우리나라의 40대 중년 남자로서 평범한 전문직 치과의사로서 이땅에 살면서 여러 가지문제가 나를 괴롭힌다. 점점 나이들어가는 몸의 변화를 느끼며 중년의 가장으로서 경제적 문제, 자녀교육, 내 인생의 남은 계획과 부부문제등 문제는 삶의 현장 곳곳에 산적해 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이고득락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한다.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찾아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인간의 삶을 고해(苦海)라고 일컫는다.
현재 우리나라의 불교는 2500년전 인도에서 발생한 원시불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그 본질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된다. 고대인도의 힌두교, 중국의 도교, 우리나라 고유의 민간신앙(샤머니즘)등이 오랜세월 뒤섞이면서 현대의 과학교육을 받은 이성인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이상한 면을 많이 가지게 됐다고 본다.
예를 들면 윤회(samsara)는 힌두교, 도솔천사상 같은 것은 중국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외에 불교경전에 나오는 이상한 신화적 존재들도 모두 힌두교(upanishad)에 나오는 신들이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정말 인류 최고의 논리학자이며 정신의학자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붓다는 놀랍게도 자신이 가르친 내용을 법(dharma) 즉 법칙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붓다는 자신이 찾아낸 이치를 종교적인 진리가 아닌 과학적인 법칙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붓다와 그 가르침에 대해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이 붓다가 가르친 것은 종교(법칙이 아닌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붓다는 자신이 가르친 것이 하나의 법칙 즉 어떤 시대와 어떤 사람에게도 통용될수 있는 보편적 법칙이라고 보았다. 다만 붓다는 자연과학적인 진리가 아니라 인문과학적 진리를 탐구했고 그중에서도 마음의 문제에 집중했다. 따라서 불교는 현대의 심리과학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붓다는 프로이트보다 무려 2500년전에 심리과학을 전개했던 것이다.
나는 붓다를 신적인 존재로 생각지 않는다. 그는 고통받는 인간을 구하고자 했던 인간, 이성적이며 철저히 인간의 마음에서 어떻게 고통이 발생하는가를 지극히 논리적으로 사유한 인류 최고의 지성적인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따뜻한 인간애를 가진….
불교는 세계를 보는 세가지 기본 통찰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무상관, 부정관, 무아관이다. 무상관이란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이다. 이름과 모양이 영원하다고 믿으면 괴로움이 생긴다. 우리 마음에 괴로움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세상 실체를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그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고 있다는 뜻이다. 현상 세계를 제대로 보고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욕망과 고통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들은 사라질 것이다. 고통이란 이렇게 덧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온다. 부정관은 욕심이 많으면 마음이 더러워진다는 것이다. 욕망에 대한 생각이 고통을 만들어내는 원천이다. 무아관은 나(자아)라는 존재가 없다는 뜻이다. 나 혹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일시적인 색(물리적인 것), 수(느낌), 상(표상), 행(의지), 식(인식 )이라는 다섯가지 에너지(skandhas)가 뭉친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은 5개의 감각기관을 통해 주위정보가 들어와서 수용되고 거기에 예전의 경험치가 비교되면서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데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 욕망의 충족행위가 반복되면서 일종의 업(karma)이 형성된다. 이 습관의 에너지가 인간을 평생토록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에 집착하면서 고통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고통의 순환사슬(cascade)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러 방법중 붓다가 제시한 명상법 위빠싸나 수행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집중과 알아차림의 방법으로 그 고통을 일으키는 순환 사슬(12 연기)을 깰수 있다고 한다.
한번쯤 이러한 인간세계 고해를 떠나 조용한 산사(山寺)를 찾아 우리의 마음을 쉬게하고 자신을 내려놓는 것은 어떨까? 산사의 청량한 풍경소리를 들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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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민 메트로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