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칼란데르스카 병원 수술실에서 페르 잉그바르 브로네마르크 교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신을 보는 듯 했습니다. 저는 숨이 막히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수술 장면을 보고 저술하신 ‘Tissue integrated prostheses’ 책을 읽으면서 성경책을 보는 듯 했습니다. 무치악 임플란트 특수 시술법을 배우려고 1972년부터 1985년까지 13년간 세계를 돌아 다녔어도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Osseointegrated implant 시술법과 보철과정은 저에게는 예수님의 기적과 같이 보였습니다.
1970년까지만 해도 모든 학자들은 이물질의 생체 골유착을 부정하던 시기였습니다. 스스로 implantologist라고 하던 치과의사들은 자연치아의 인대 역할을 할 수 있는 섬유유착의 이론을 주장하던 시기였습니다. 교수님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우리는 섬유조직 유착의 미로를 헤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수님은 당대의 실상을 뛰어넘는 임상적 성공의 세계를 여셨습니다. 주의 깊은 수술방식으로 titanium이 뼈에 붙는 내용을 관측해낸 결과는 치의학의 기초 임상 모든 부분에 혁명을 일으키셨습니다.
1985년 북한치과의사들이 찾아와 교육을 받고 남한보다 먼저 Branemark system을 도입해 갔다며 김일성의 x-ray 사진을 복사해 주시겠다고 하시던 생각이 납니다.
미세혈류학을 연구하시던 교수님이 현미경관측창치를 포맷한 타이타늄 껍질구조가 실험이 끝나 제거하려 했을 때 토끼 뼈에 붙은 것을 발견하시고 즉각 치과 implant 연구로 방향을 선회 하신 것을 보고 모든 과학의 중요한 부분들은 우연히 발견되었음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켜 주셨습니다. 연구자들은 시행기법에만 아니라 관찰 또한 정밀 정확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간 implant 표면이 기계절삭면에서 미세조면으로 바뀌어 가는 시기에 엄격, 정확, 청결의 기본만 주장하시던 원 발명자로서의 다소의 불만을 엿보이셨지요. 그래서 교수님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저는 smooth machined를 씁니다”라고 하니까 “당신이야 말로 나의 진정한 친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교수님이 고안한 Novum에는 조면을 적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제품 Zygoma 등에는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시대의 흐름을 따르신 것이지요.
10년의 기초 및 동물실험, 이후 15년간 임상실험을 통해 엄청난 실증을 쌓아 노벨에 버금가는 업적을 이루셨습니다.
1990년 6월 Gothenburg에서 개최된 ‘Osseointegration 25years’기념행사에는 1965년 최초로 시술 받은 환자 고스타 라손이 증인으로 나왔었지요. 얼마나 쓸 수 있냐고 묻는 환자들이 많습니다. 그가 40년을 사용하고 2006년 작고했으니까 그 이상은 저희들도 궁금했었지만 저는 영원일 것으로 믿었습니다. 저에게는 이미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환자는 올해로 48년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엔 정형외과에서 시도했지만 최고의 성취는 치과의학에서 이루셨습니다. 저는 귀국 후 79년부터 사용한 섬유유착성 임플란트는 다 버리고 86년에 첫 번째 환자에 교수님과 같은 signature system을 시술했고 그 환자는 지금도 29년 동안 사용하고 계십니다.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도 3번이나 다녀가시면서 우리를 격려 고무시켜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수천만의 환자가 교수님의 연구로 혜택을 받아 왔습니다. 저는 지금껏 1250명의 환자에 6000례 밖에는 시술하지 못했으나 한 일간지 보도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한해 50만개나 시술된다는 것입니다. 무치악을 전공했던 저의 서울대학 교수 생활에서 모든 명예를 걸만한 가치 있는 일은 이일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1986년 귀국 시에 교수님 계통의 임플란트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도입했던 것입니다. 가르침에 존경하고 감사드립니다.
1970년 중반까지만 해도 교수님의 연구결과는 인정을 받지 못했고 연구비지원도 수차례 거부당했었지요. 서울대학에서도 86년 당시에는 아직은 시기가 아닌 것으로 평가받고 실험적 시술만 진행되어 왔었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진위를 파악하기 위한 데이터와 관찰에 주력해온 것이지요. 87년 이후에 가능성이 엿 보이기 시작할 때 시제품도 만들고 특허와 생산허가까지 받았으나 교수님의 명예를 도용하는 일이 될까 염려되어 저의 연구결과로만 묻어 두었습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Brazil 등의 Osseiointegration center에서 꾸준히 특수 환자 시술과 개발에 집중하시면서 위대한 유산을 많이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2014년 12월 14일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20년 전부터 교수님의 연구업적과 신념을 믿고 원하시던 학부학생들에게 임플란트 강의와 실습을 시행해 왔습니다. 사회가 첨단으로 발전하는 시점에서 임플란트가 없었다면 치과의학은 무엇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예전에 어떤 환자는 “움직이고 불편한 틀니에 못을 박아 고정하면 될 터인데 왜 치과의사들은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던 환자의 불평을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멀리서도 들으셨던 것 입니까?
Osseointegration이란 의학용어를 만들어 Webster 사전에 들어갔다면서 흐뭇해하셨었지요. Branemark 교수의 꿈도 이루셨지만 덕분에 치과의사들의 작은 꿈도 이루어졌습니다. Las Vagas 학회 때에는 건강이 여의치 않으셔서 영상 강연으로 대신하면서도 “사람이 죽을 때 치아도 없이 관속에 들어갈 수는 없지 않느냐”하는 유머러스한 표현을 하셨지요. 앞으론 그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한동안 병고에 시달리시다가 이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세계인이 애도를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이젠 편히 쉬십시오.
김영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