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8년이 넘었지만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은 내 인생에 새로운 세계가 열린 날이다.
항상 존재하고 있었지만 내가 사는 세상과는 관계가 없는 세계이기에 내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그 정글의 세계에 처음 문을 열고 들어간 날이다.
2007년 5월 17일로 기억된다. 배드민턴 라켓과 신발 가방을 팩키지로 장만해서 배드민턴 체육관을 찾아간 날이….
그 전까지는 헬스장이나 스쿼시장 indoor 골프장에 가서 운동을 했었다. 그런 사설 체육시설은 내가 고객이기 때문에 가면 사장님과 코치가 인사하며 운동법을 가르쳐 준다. 난 고객이므로 다른 고객들과 함께 운동만 하고 오면 된다.
그런데 배드민턴은 그게 아니었다.
동호인들이 모여 초등학교 체육관을 시간제로 임대해서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배드민턴을 한다.
배드민턴 클럽에 가입하는 것도 입회비만 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클럽 임원단의 허가가 있어야 가입할 수가 있다.
매달 회비를 내고 돌아가며 당번을 정해 클럽 체육관 청소도 한다. 네트도 치고 걷고 코트바닥 청소도 하고 쓰레기도 버려야 한다.
일주일에 3번씩 월·수·금은 레슨도 받는다.
힘들다. 숨이 찬다. 다리가 떨어지지 않는다. 코치가 말하는 동안의 그 잠깐의 정지 시간이 달콤하다.
엘보우가 아프다. 왼쪽 무릎이 아프다. 이번엔 오른쪽 무릎이 아프다… 오른쪽 손목…어깨…왼쪽 발목…오른쪽 발목… 허리… 고관절…목관절까지 뻣뻣하며 아프다… 하나가 나으면 다른 하나가 아프다….
온 관절과 근육이 아파서 식당에 가서도 양반자세로 앉지 못하고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왼손으로 바닥을 짚고 앉아 식사를 한다.
엘보우가 아플땐 치과에서 핸드피스 들기가 겁난다. 찌릿찌릿 아프다.
사랑니 발치를 해야 하는데 엘보우가 너무 시큰거린다.
손가락과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히고 운동화를 신은 새끼발가락엔 물집이 여러번 생겼다 터지기를 반복한다.이거 정말 장난이 아니다….
다들 엘보우나 무릎에 보호용 아대를 하나씩 차고 배드민턴을 친다.
이렇게 아프고 힘든 데도 난 오늘도 퇴근시간이 기다려진다.
이미 마음은 배드민턴 코트에 가 있다.
치과일을 하면서 생긴 온갖 번뇌망상을 떨쳐버리고 저 평화로운 피안의 언덕으로 건너갈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내마음은 설레기 시작한다.
배드민턴을 치는 시간엔 오직 셔틀콕에만 집중하게 된다.
몸을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심장은 자기 용량의 최대치를 내품고, 뇌는 시신경을 타고 들어온 하얀 셔틀콕의 좌표를 확인하느라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없다. 나의 모든 오감 육감은 셔틀콕과 보이지 않는 촉수들로 연결되어 있다. 물아일체. 나는 셔틀콕과 하나가 된다.
이순간 난 무아의 경지,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
그렇게 배드민턴과 함께 8년을 넘게 살아왔다.
나의 생활반경이 치과계에서 체육계로 넓어지면서 체육인들의 노력, 경쟁, 눈물, 기쁨 등에 대해 알게 되었다.
보통 일반인들이 즐겨하는 생활체육 말고도 진짜 전문적으로 운동하는 엘리트코스가 있다.
초등학교때부터 계속해서 운동해오고 새벽운동, 아침운동, 오후운동, 저녁운동을 하며 목숨걸고 운동하는 엘리트운동선수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초보때는 몰랐는데 점점 배드민턴 실력이 늘고 여러 대회에 출전하면서 운동선수들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다. 운동을 하고 실력이 늘면 늘수록 나보다 더 잘하는 고수들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공부도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지고 공부할 게 더 많아지듯이, 배드민턴도 하면 할수록 어렵고 잘 하는 고수들이 더 많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국가대표가 얼마나 대단한건지 알게 되고 그들의 인간적인 노력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된다.
역시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리는 법인가 보다.
이렇게 배드민턴을 하다가 우연히 전국치과의사 배드민턴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2011년 가을에 제1회 전국치과의사 배드민턴대회가 천안에서 열렸고 2012년 제2회, 2013년 제3회 대회가 역시 천안에서 열렸다.
거기서 대회를 주최하신 전명섭 원장님을 처음 만났다. 전원장님은 다재다능하신 분이다. 배드민턴도 잘 하고 치협 국제이사도 지내셨고 국가대표선수들 팀닥터도 하시며 치과계와 체육계의 가교 역할을 해 주시고 계신다.
올해 여름엔 광주유니버시아드대회에 지원나가셨고 현재도 태릉선수촌 치과닥터로 봉사하고 계신다.
작년엔 전원장님이 천안에서 서울로 이사를 하시느라 대회를 준비하지 못했다가 올해 제4회 전국치과의사 배드민턴대회를 태릉선수촌에서 개최해 주셨다.
이용대, 유연성 선수를 비롯한 70여 배드민턴 국가대표선수들이 밤낮으로 훈련하는 태릉선수촌 오륜관에서….
태릉선수촌….
이곳도 분명 존재하기는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배드민턴을 즐기는 동호인들에게는 현실세계에서는 갈 수 없는 이상향과 같은 곳이다.
그 태릉선수촌 배드민턴 구장에서 게임을 했다. 국대들의 체취를 느끼며 녹색판이 깔린 태릉선수촌 오륜관에서 배드민턴 게임을 8게임이나 했다.
푸하하하… 너무나 뿌듯하고 온 몸이 황홀하다.
점심도 태릉선수촌 식당에서 했다. 옆테이블에 국가대표들이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국가대표와 식사를 하다니…한입 한입 넣을 때마다 입에 전율이 느껴진다.
사실 태릉선수촌에 일반인은 들어올 수가 없다.
선수촌 정문에서 검사를 한다. 선수와 관계자들만 출입이 허가된다.
이번 태릉선수촌 1일 입촌은 전명섭 원장님의 도움으로 스포츠치의학회와 치협 문화복지위원회의 스폰을 받고 또 치협이 태릉선수촌에 협조공문을 보내 이루어진 것이다.
앞으로는 다시 태릉선수촌에서 치과의사배드민턴 대회를 개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말씀에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태릉선수촌에서의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처음엔 그저 개인적인 운동을 위해 배드민턴을 시작했는데 하다보니 점점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전주에서 배드민턴을 즐기는 치과의사들의 모임이 있다. 동호회 이름은 덴탈콕(Dental Cock).
전북 치과의사및 전북신협 직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모임이다. 문진균 전북신협 이사장님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20여명의 멤버들이 매월 모여 즐거운 배드민턴 게임을 한다.
이번에도 전북 덴탈콕 멤버들은 버스를 대절해서 태릉선수촌에 다녀왔다. 가족들을 동반해서 함께 태릉선수촌에서 배드민턴도 치고 식사도 하고 구경도 하고 왔다. 오랜만에 가족들에게 점수를 땄다.
배드민턴 동호회 클럽에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만나고, 전주 덴탈콕 회원들도 만나고 이번엔 태릉선수촌에 가서 전명섭 원장님과 김홍열 전국치과의사배드민턴 회장님을 비롯해 전국에서 온 여러 지역 치과의사선생님들을 만나고 왔다. 생각보다 많은 치과의사들이 배드민턴을 즐기고 있었다.
내 삶의 시간과 공간에서 점점 배드민턴이 차지하는 시간과 공간이 많아지고 있고 나의 경험과 추억을 쌓아가는 나의 기억 해마에는 배드민턴 기억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인생 참 재미있다.
어떻게 하다보니 배드민턴을 알게 되었고 어떻게 하다보니 전주 덴탈콕모임을 알게 되었고 어떻게 하다보니 태릉선수촌에까지 갔다.
인생….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키면서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겠지만 이렇게 배드민턴으로 얽히고 설키면서 살아가는 것은 괜찮은 것 같다.
8년 넘게 배드민턴은 내게 건강과 기쁨과 에너지를 주었고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오랫동안 배드민턴을 즐기며 내 삶을 아름답게 채워가고 싶다.정대연
익산 베스트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