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분쟁을 바라보며 - Sorry Works?

2021.08.09 09:42:02

Relay Essay 제2460번째

오자병법에 “다섯 번 이긴 자는 큰 해를 입고, 네 번 이긴 자는 피폐해지며, 세 번 이긴 자는 패자(覇者)가 되고, 두 번 이긴 자는 왕이 되지만 한 번 이긴 자는 황제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은 이기는 자에게도 엄청난 손실을 입히기 때문에 가급적 싸움을 피하되 정말 불가피할 경우 결정적인 한 번의 전쟁에 전력을 다해 승리해야 한다는 의미이죠. 이 말은 승자나 패자 모두에게 상당한 스트레스와 손해를 남길 수 있는 소송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평생 그런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일선에서 진료활동을 하다보면 한번쯤은 피하기 어려운 경험이 치료 결과를 두고 환자와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이 때 의사들이 초기 대응을 잘해야 한다는 의미로 한 때 많이 회자되던 “Sorry Works”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 거짓말과 변명으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지 말고, 처음부터 솔직하게 환자 측에게 “미안하다, 유감이다”라는 말로 공감하여 주면 심각한 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무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만 대처하거나 환자 측과 감정적으로 대립하지 말고 그들의 아픔과 상실감에 공감하여 주면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취지이기도 합니다. 이론상으로는 정말 당연한 소리죠.

 

그런데 문제는, 환자 측이 의사가 “미안하다”라고 말한 것을 녹음하여 의사가 모든 과실을 인정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꽤 많다는 점입니다. 의사의 과실이 분명하기 때문에 의사가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고 분쟁을 해결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의사 역시 당황한 상태에서 격양되어 있는 환자 가족을 달래고 민망한 상황을 일시적으로 모면하기 위해 “미안하다, 유감이다”라는 말을 했다가 이런 말이 의사의 발목을 잡는 경우에는 참으로 난감해집니다.

 

의사의 과실 여부가 불문명한 의료사고가 발생한 경우, 그나마 환자들과 잘 소통하는 의사들은 처음에 ‘유감이다’, ‘결과가 이렇게 되어 안타깝다’ 정도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는 영어로 ‘I feel sorry’에 가까운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환자 측이 계속 집요하게 항의를 하면 ‘치료에 일부 아쉬운 면이 있었다’는 취지로 나아가다가 환자 측이 더 다그치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죄송하다’라고 이야기를 마무리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건 환자 측이 듣기에 단순한 ‘I am sorry’와는 매우 다르게 다가와, 대부분 환자 측은 이 대목에서 ‘드디어 의사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백했다’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이러한 발언이 의사에게 어느 정도 불리하게 작용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의료과실을 인정할 객관적인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런 녹취록만으로 과실이 인정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리하게 전개되는 조정이나 소송을 뒤집기 위해 마치 비장의 무기처럼 이러한 녹취록을 내놓은 환자 측에게 왜 이러한 녹취록이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없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쉽지 않습니다. 결국 환자 측은 의사가 과실을 인정했음에도 조정기관이나 법원이 부당하게 의사의 과실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오해하여 조정결과나 판결에 쉽게 승복하지 못하게 되는 주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보니 요즘 의료계에서는 의료사고 발생 후 환자 측과의 대화는 일단 녹음된다고 보고 미안하다는 말을 쉽게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고도 하네요. 하지만 반면에 이런 경우 환자 측은 진심어린 사과만 했어도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진정한 사과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저는 경험상 돈이 목적이 아니라는 환자 측의 주장을 잘 믿지 않습니다만, 실제로 병원 측의 소극적이고 무성의한, 어쩌면 너무 냉정해 보이는 대응이 감정의 골을 깊게 하여 결국 회복되지 못할 지경까지 이른 경우도 상당히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성적으로 대응을 해도 안 되고, 감정적으로 공감하며 사과를 해도 안 되고, 그럼 환자와 분쟁이 발생한 경우 도대체 어찌하란 말일까요. 안타깝게도 매뉴얼처럼 정해진 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평소 어려움을 당한 동료들에게 여러 조언을 하시던 분들도 막상 자신에게 그 일이 닥치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이고요. 다만, 모든 분쟁해결의 시작은 상대방이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 말고 그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빨리 파악하고 그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의료진의 태도에 상처를 입어 의료진의 공감과 사과를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여 그에 따른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의료사고를 핑계로 돈만 받아내겠다는 것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할텐데,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30년 넘게 진료를 해오신 분들 중에 갈수록 환자를 상대하기 어렵고,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고 하시는 분들을 종종 뵙니다. 그분들에게 그저 살얼음판이 깨지는 일이 없기만을, 그리고 요즘 세상에서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일을 하는 직업이 결코 의료인만은 아니라는 말씀밖에 드릴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하태헌 변호사(서울치대 95년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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