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이롭다

  • 등록 2026.02.19 10:4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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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트럼

한창 살을 에는 추위가 살벌하게 기승을 부리더니, 점차 해가 빨리 뜨고 늦게까지 머무는 것이 봄이 조금씩 찾아오고 있음을 체감하게 한다. 새로운 시작을 반기기 전, 이제 떠나야하는 내 첫 직장(?)을 정리하기 위해 강의실의 캐비닛을 조금씩 비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냥 작은 캐비닛일 뿐인데, 한참 살던 집에서 이사 가는 것 마냥 어찌나 추억이 담긴 물건이 많던지. 마음이 울컥해져 짐을 정리하는 데 한 세월이 걸렸다.


3년 동안 썼던 이 좁은 공간에는 캐비닛을 처음 배정받고 설레어하며 병원복을 입었던 원내생 때의 풋풋함부터, 시험 기간에 눈물 흘리며 필사적으로 외웠던 필기 흔적, 생일이라고 동기들이 빼곡히 적어준 편지들, 그리고 인턴 생활 내내 주머니에 꽂고 살았던 꼬질꼬질한 인계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고작 지난 몇 년의 흔적인데 어쩜 그렇게 한 톨도 놓치기 아까울 정도로 소중한지, 그 치열했던 순간들이 사실은 얼마나 찬란한 시간이었는지 이제야 실감한다.


돌이켜보면 이 캐비닛 안에는 원망의 조각들도 섞여 있었다. 학생 시절, 끝도 없는 강의실 의자에 앉아 “대체 이걸 왜 배워야 하지? 임상에 나가면 정말 쓰긴 하는 걸까?”라며 오만하게 투덜거렸던 기억이 난다. 인턴 생활은 또 어땠나. 8시부터 진료시작이지만 6시 30분까지 출근해야 할 때면 “도대체 왜?” 라는 억울함과, 석션 기계가 된 것 마냥 하루종일 앉지도 못하고 석션만 할때면 “이걸 왜 내가 해야 하지?”라는 회의감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쓸모없어 보였던 시간들이 결국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단단한 근육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수많은 예진을 하며 환자에게 질문하는 방법조차도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이론으로만 알던 지식은 응급실 당직을 서며 쩔쩔맸던 순간이 있었기에 비로소 내 것이 되었다. 비워진 캐비닛 바닥을 닦으며 세상에 무의미한 경험이란 단 한 조각도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이제 나의 320번 캐비닛은 새로운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거의 마쳤다. 나는 이곳에 나의 불평과 조급함을 두고 떠난다. 대신 그 자리에 남은 온기와 배움,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은 이롭다”라는 귀한 확신을 얻어간다.


병원 문을 나서는 길, 아직은 춥지만 해가 늘어져 깜깜하지만은 않은 저녁빛이 반갑다. 퇴근길에 지나치는 의대도서관 통유리에는 머리를 뜯으며 공부하는 학생들이 보인다. 힘들겠지만 결국 찬란한 시간이 될 것이기에 마음속으로 응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혜화에서의 지난 5년, 희로애락이 담겼던 모든 순간이 나를 배신하지 않고 오늘의 나를 만들었기에, 앞으로 마주할 어떤 낯선 계절도 결국 나를 꽃피우게 할 것임을 이제는 확신한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 앞에서, 앞으로도 수없이 ‘이걸 꼭 해야 하나’, ‘왜 하필 나일까.’를 묻게 될 것을 안다. 하지만 그 질문 끝에는 분명 또 다른 성장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에 그저 기대될 뿐이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최예슬 서울대학교 치과병원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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