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해져버린, 꿈

2023.08.03 12:14:52

Relay Essay 제2564번째

본과 1학년, 아무리 해부학이 무시무시하다고는 하지만, 없는 시간을 내서라도 놀러 다니곤 했다. 실습으로 꽉 차 있는 본과 2학년 때는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목하에 음주를 즐기곤 했다. 폴리클과 원내생으로 슬슬 임상에 가까워졌지만, 학생이라는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던 건지 나한테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병원 제도와 방식들이 불만족스러워 최대한 학교 밖에 있었다. 그렇게 몸은 학교에 마음은 저 먼 구름 위 어딘 가에 두며 본과 생활을 지내다 보니, 어느새 수련을 받을지 혹은 본교에 남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본과 4학년이 됐다.

 

인생은 진지함에 약간의 유머를 더하는 것일 뿐. 농담이 반이나 섞인 농담 반 진담 반을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앞으로의 진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때마다 머리가 무거운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머리가 아픈 김에 왜 이곳에 지원하게 됐는지, 초심은 어땠는지 두 눈을 감고 한 번 돌아봤다.

 

“구강악안면외과를 전공해서 턱관절 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들을 치료하고 싶습니다.”

 

사실 치과에는 어떤 과들이 있고, 각 과가 어떤 환자들을 보는지 몰랐다. 1년 동안 채 썰어진 사과만 먹을 수 있었던 고등학생의 나를 구원해 준 치과 원장님이 구강외과를 전공하셨고, 턱관절 질환만 전문으로 보셨다는 사실 외에는. 그저 그 원장님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치과에 대한 지식은 전무한 채 구강외과에 대한 진심만 담아 제출했던 자기소개서는 그렇게 합격과 동시에 뒤로 잊혀버렸다.

 

“무슨 과 가고 싶어?”

“…… 구강외과 가고 싶어서 들어오긴 했는데 말이야…….”

 

확신에 찬 말끔한 정장 차림의 지원자는 입학 후 동기들과 놀러 다니는 게 좋았고, 방학을 약 일주일간 빼앗아 가면서도 유급의 압박을 주는 구강외과에 대한 애정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뿐일까? 치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하기 전부터 봉사동아리를 알아보며 봉사에 대한 설렘과 포부 가득했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봉사활동 날짜가 뜨면 자원해서 가는 방식인 현 동아리에서 봉사활동을 간 기억이 이제는 까마득하다. 심지어 그 전에 봉사활동 갔을 때 내가 진심과 정성을 다했던가? 나이가 들면 최소 10년은 봉사만 온전히 하고 싶다는 과거의 소망이 무색하게, 봉사 장소에 환자가 적으면 빨리 집에 갈 수 있다고 좋아했다.

 

사실 아직도 나는 내가 수련을 받고 싶은지, 받는다면 무슨 과를 가고 싶은지, 본교에 남아야 할지 모르겠다. 단 하나의 고민도 확신이 없다. 인생 선배님들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51대 49’라는 것과 다르게 ‘50대 50(정확히는 0대 0)’인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입학 전과 후를 돌아보면 명쾌한 답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다. ‘그땐 그렇게 순수하고 진심이었구나’ 하고 회상에 젖어 맥주 한 캔에 닭 다리 한 개를 뜯으며 껄껄 웃는 순간이 추가될 뿐.

 

‘인생’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 인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는 안 나와 있다. 순서를 조금 바꿔서,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 인생이라면 그 선택대로 인생이 만들어지는 거겠지만 사실 인생은 애초에 정해져 있는 거고 따라서 하늘에서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인 우리가 항상 터질 듯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지는 않을까. 1분을 고민하든, 1시간을 고민하든, 한 달을 고민하든 그건 애초에 정해진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었고 인생에 별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면? 에잇, 결론이 안 나오니 운명론자가 돼버렸다.

 

현실적인 문제, 이를테면 체력, 돈, 본가, 성적과 묻혀 두었던 소망의 재시동 사이에서 고민하기에는 당장 심사가 얼마 남지 않은 졸업논문이 더 급하다. 그래도 한 번쯤 초심을 돌아보며 내가 어떤 치과의사가 되고 싶었는지, 더 나아가서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를 돌아본다면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하는 사람들도 희미하게나마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졸업한 지 오래되신 선배님들이 보면 참 우습겠지만, 입학해서 3년 반이라는 기간이 지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본과 4학년은 머리가 커버린 학년인 것 같다. 알맹이 없이 각종 트릭과 퍼포먼스만 늘어버린 것 같으면서도 이렇게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는 걸 보니 졸업할 때가 오긴 왔다는 생각도 든다. 입학할 때의 마음과 졸업 직전의 마음, 그리고 졸업 후의 마음이 다 다르겠지만 전국에 있는 모든 치대생이 본인의 초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각자가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 않고 뚝심 있게 걸어 나가길 바라는 바이다.

유시원 전남대 치의학전문대학원 본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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