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 영화와 클래식 음악 (하)
<1957호에 이어 계속>
4)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2008)과 Tannhauser
벤자민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셨던 할머니가, 언제나 우울해 보이는 그를 위해 처음 연주해주던 곡은 Chopin의 polonaise op.53 ‘영웅’이다. 이 빛나는 곡을 통해 앞으로 있을 축복 및 영광을 예견해 준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그에게는 삶에 대면할 용기가 생겨 세상 밖으로 나아가게 한다.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나고 그들의 삶으로부터 교훈을 얻고 경험들을 축적하며 성숙해지지만, 자신의 몸은 데이지와의 결혼을 정점으로, 점점 어려지면서 내면의 원숙함과의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전했던 선장의 말대로, 어떤 인생을 살았을지라도 혹은 과거에 미련이 있을지라도 마지막 순간에는 이 모든 것을 놓아줘야 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삶이 아닐까.
벤자민이 어린(?)시절, 왕년의 오페라가수 할머니가 부르셨던 곡은 R. Wagner의 Tannhauser 중 2막에서 엘리자베트가 부르는 ‘노래의 전당(Dich, teure Halle)’이다. 이 오페라는 ‘탄호이저와 바르트부르크의 노래자랑’이 원래 제목으로, 음유시인 기사인 탄호이저가, 요염한 마녀 베수스에게 꼬여 관능의 포로가 되어 정신 못 차리고 지내다가 순수한 엘리자베트가 진실된 사랑으로 그의 영혼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자, 뒤늦게 정신차린 탄호이저도 그녀의 시체를 붙들고 숨이 끊어져서 결국엔 영혼의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노래의 전당’은 엘리자베트가, 노래자랑이 열리는 바르트부르크 성안의 큰 홀에 등장하면서 부르는 곡으로, 탄호이저가 오랜만에 이 대회에 모습을 보이자 그 기쁨을 표현하는 모습이다. 순수하면서도 고귀한 그녀가, 환락의 세계에서 돌아온 자신의 남자의 귀환을 설레임 속에 반기는 모습은, 얼핏 남녀 주인공의 역할이 바뀐 것 같지만 벤자민과 데이지의 영화 속 앞날을 암시하는 듯 하며 결국 서로를 이해하며 생을 마감하는 모습에서 두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유사함이 있는 듯하다.(2009. 1. 27)
5) Closer(2004)와 Mozart Cosi fan tutte, Rossini La Cenerentola
‘Hello, Stranger". 어찌 보면 가장 순진하고 상처받기 쉬울 것 같던 앨리스(나탈리 포트만)가 변화무쌍하며 낯선 인물이고, 가장 잘 속이고 날라리스러운 댄(주드 로)이 가장 상처를 크게 입고, 자기 주관이 뚜렷할 것으로 보이던 안나(줄리아 로버츠)는 현실을 직시하고 안주하게 되며, 열정적으로 사랑만을 쫓을 것 같았던 래리(클라이브 오웬)는 즐길 것 다 즐기고 실속을 차린 셈이 되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The Closer) 참으로 낯선 그들이다(The Stranger). 오늘날 우리 주변을 투영하는 pathos도 과연 이처럼 자기중심적이면서도 낯선 일상의 자조(自嘲)가 아닐 지 고민해 보게 된다.
댄과 래리가 변태적으로 채팅을 즐길 때 흘러나오던 긴 호흡의 음악은 Rossini의 ‘라 체네렌톨라"서곡이다. 이 오페라는 그 유명한 신데렐라를 각색한 것으로, 계모대신 계부가 나오고, 왕자는 자신의 몸종과 신분을 바꿔치기 하여 속이는 등 보다 극적이지만 마법이 없는 내용으로 바꾸어 즐겁고 유쾌한 작품이 되었다. 댄이 인터넷상 여성으로 ‘변신"하여 주고받는 내용을 냉소적으로 암시하는 배경음악이었다.
또 댄과 안나가 늦어서 들어가지 못하는 오페라(하지만 후반부의 음악은 계속 들을 수 있다)는 모차르트의 ‘코지 판 투테"로 우리말로는 ‘여자들은 다 그래"란 뜻의 작품이다. 두 명의 여인이 자신들의 남자들에게만 충절을 다할 것 같고, 이들의 남자들도 이를 공언했지만, 어떤 인생의 선배로부터의 제안으로 여인들이 결국 변심할 수 있음을 몸소 확인했으나, 이는 어쩔 수 없고 자연스러운 것이니 노여움을 풀고 이해하라는 해피엔딩의 오페라이다. 이 오페라 속의 근대 연인들도 결국엔 서로에게 ‘stranger"였었던 것일까.
공교롭게도 모차르트가 요절한 다음해에 로시니가 태어났고, 곡을 쓰는 속도나 스타일도 비슷하였으며, 놀고 먹는 것 좋아하는 것도 닮아 혹자는 모차르트가 환생하여 로시니가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혹자는 모차르트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것으로 하고 자취를 감추었다가 로시니에게 곡을 주어 발표하게 했다는 음모론까지 제기하고 있다. 후자의 주장의 근거로 로시니가 37세까지만 작곡을 하고 그 이후엔 거의 곡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들고 있으나, 아무래도 호사가(好事家)들의 창작으로 보여진다. 시니컬한 영화 속에 흐르는 밝은 두 오페라부파의 의미심장한 조합은 너무 건조하거나 무거울 수 있는 극전개에 신선함을 더해주었다.(2005. 2. 7)
6) Man on fire(2004)와 Chopin Prelude #6 in b minor op.28
덴젤 워싱턴(크리시)이 alcoholic인 보디가드로 나오고, 다코타 패닝(피타)이 그의 보호를 받는 멕시코의 귀여운 부잣집 딸내미로 나온다. ‘크리시"가 ‘피타"를 처음 대면하게 될 때, 이 소녀가 피아노로 연습 중이던 곡이 Chopin의 전주곡 중 6번 일명 ‘빗방울"이었다. 근데 15번도 ‘빗방울"이라고 불리고, 사실 후자로 흔히 말하고 있다. 쇼팽이 건강이 좋지 않자, 조루주 상드가 파리 사교계를 떠나 그와 함께 마요르카라는 섬으로 떠나 생활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곳에서 쇼팽은 전주곡 24곡을 작곡하게 되는데, 이 곡 속에는 사랑, 아쉬움, 언젠가는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상드는 결국 쇼팽과 헤어지고, 쇼팽은 그 뒤 파리의 호텔방에서 39세로 사망하게 되지만, 상드는 그의 장례식에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크리시와 피타는 불안하면서도 서먹서먹하게 만났으나, 크리시는 결국 피타를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녀에게 최고의 사랑을 선사하게 된다. 알고보면 영화의 반전처럼, 음악에서의 반전도 제법 쏠쏠해 이들의 의미심장함에 신선한 재미를 느껴본다.(2004. 8. 3)
7) The Notebook(2004)과 Chopin Prelude #4 in e minor op.28
앨리가 시골에서 뉴욕으로 떠나기 전날 어떤 한 폐가에서 남친 ‘노아"가 듣던 말던 허름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조율 안된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던 곡이 쇼팽의 전주곡 op.28 중 4번째 곡이다. 이윽고 그 둘은 뭔가 중요한(!) 일을 하려했기에 가뜩이나 짧은 곡이 전반부 이후에 짤리게 되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후에 병원에서 할머니가 다시한번 연주해 주기에 섭섭한 감이 조금은 덜해진다. 피아노를 칠 줄 모른다던 할머니가 갑자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9번 1악장을 연주하다가(베토벤 소나타 중에선 그나마 쉽다지만 너무나도 좋은 곡이다.) 잠깐 멈칫한 후 쇼팽의 이 곡을 연주한다.(4번은 짧지만 좋아하는 곡이다. 프렐루드는 24곡을 쉬지 않고 듣는 것이 정설이지만, 이 곡은 따로 아껴두고 반복해서 듣고 싶다.)
앞서 ‘Man on Fire"라는 영화에서 쇼팽과 상드의 일화를 잠깐 소개했었는데, 소심하면서도 일관된 순수한 사랑을 성실히 보여주는 면에서 쇼팽과 노아가 닮아있고, 자유분방하면서도 자신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확인하고 싶어하는 면에서 상드와 앨리가 닮은 듯하다. 하지만 쇼팽과 상드의 결말과 이 영화 주인공들의 그것은 분명 달랐으니, 아름다운 시골의 경관과 결코 서두르지 않는 줄거리를 편안히 감상하시면서 이를 찾아보시기 바란다. 가을은 이미 지났건만, 폴리니의 쇼팽 전주곡이 유난히 그리워진다.(2004. 12. 8)
현홍근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소아치과학교실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