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베트남

2023.02.08 16:00:09

Relay Essay 제2539번째

코로나가 극성이던 2022년 여름, 나는 결혼식장에서 옮아온 코로나로 인해 집에서 격리되어 골골거리고 있었다. 고열에 시달리던 중 직장동료로부터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베트남… 갈거지?’ 짧게 한마디 던진 친구. 소상히 물어보기엔 너무 몽롱한 상태여서 일단 알았다고 하고 끊었다. 격리가 끝난 후 나는 25년 넘게 베트남에서 구순구개열수술을 이어왔던 유서 깊은 일웅의료봉사단에 합류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웅은 민병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명예교수의 뜻을 기리기 위해, 교수님의 호 ‘일웅(一雄)’을 따서 설립된 의료봉사회라고 한다.)

 

봉사활동을 떠나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 참으로 많았는데, 나를 포함한 전임의 두 명과 간호사 세 명이 450개가 넘는 물품들을 하나하나 챙기고 짐을 싸느라 고군분투하며 밤도 참 여러 번 새웠다. 너무 힘들 때에는 냉큼 베트남에 가겠다고 한 내 방정맞은 입을 탓할 때도 있었고, 하필 역병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그때 베트남에 가겠느냐고 전화했던 동료를 원망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 준비가 미진해서야 봉사활동 못 가는 거 아니냐며 멘붕을 하루 세 번씩 하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11월 말 겨울이 되어 버렸고 어느새 나는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호치민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정도 차로 달려가니 빈증성이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사이공강이 흐르는 이곳은 베트남 제2의 공업도시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베트남 하면 내 머릿속에 떠오르던 편견 어린 이미지(삶에 지친 현지인들이 길가에 앉아 있는 재래시장이나 관광지…)와는 사뭇 다르게 거리엔 예쁜 조명이 반짝반짝했고, 강가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거나 키우는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의 얼굴엔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그리고 12월은 건기가 시작되는 시기라서 걱정과는 달리 날씨도 온화했다. 도착한 다음날 아침 우리는 예진을 위하여 빈증성종합병원으로 향했다. 45명의 환자와 보호자들이 토요일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대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당황한 나와는 달리, 함께하신 일곱 분의 교수님들께서는 프로였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진료를 시작하셨고, 현지의 의사, 간호사, 의료보조인들과는 마치 오랫동안 알던 친구들처럼 눈짓 하나로 소통하셨다. 그제서야 비로소 이 의료봉사회가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이 구역의 모든 환자를 다 볼 것처럼 흰 가운을 휘날리며 위풍당당하게 병원에 들어선 나, 그날 맡은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예진 환자들의 볼에 순번을 표시하는 스티커를 열심히 붙이는 일이었다. 우는 아이 달래기는 덤.

 

태어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부터 30대의 성인들까지, 그리고 일측성, 양측성 구순구개열, 일부는 외상 후 안모추형으로 온 환자들까지 환자군은 아주 다양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온 일웅의료봉사회는 현지에서도 이제는 유명하여, 호치민뿐만 아니라 베트남 전역에서부터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날 온 환자중에는 하노이에서 호치민까지(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의 4배가 넘는 거리라고 함) 40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온 분도 있었다. 예진을 보며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예전에 일웅 의료진들에게 수술 받았던 환자들 다수가 또 진료를 받으러 왔다는 점이었다. 일반적으로 먼 타국에서 잘해야 일 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해외의료봉사활동은 치료했던 환자들을 경과관찰하거나 후속치료를 이어서 하는 것이 쉽지가 않은데, 일웅재단에서 치료한 환자들은 동일한 외과의사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팔로우업이 되고 있는 것이었다. 구순구개열환자의 치료는 한 번의 수술로 치료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수술이 순차적으로 필요하고, 특히나 그 수술이 성장과정 중 적절한 시기에 개입되어야 하기 때문에 일웅재단의 꾸준한 노력은 더욱 특별한 것이었다.

 

예진을 거쳐 실제 수술이 필요하다 결정된 환자는 그중 절반가량이었고, 5일에 걸쳐 총 24명의 환자를 수술하였다. 분당서울대병원 마취과에 계셨던 오용석 명예교수님께서 마취 전반을 책임져 주셨고, 다섯 분의 구강악안면외과 교수님들께서 수술을 집도하셨다. 서울대학교치과병원의 최진영, 서병무, 양훈주 교수님, 서울아산병원의 안강민교수님, 울산대병원의 성일용 교수님 모두 국내외에서 구순구개열 수술에 많은 경험을 축적하신 분들이다. 케이스는 편측성 및 양측성 구순구개열수술부터 구순비성형수술까지 다양했다. 피부, 구강내 점막, 그 하부 근육을 조작하는 모든 수술과정에서 극도의 섬세함이 깃들어 있었고, 보고 있노라면 어떠한 순간에는 수술이 기술보다는 예술에 가까워지는 순간도 있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귀연골을 이용하여 무너진 콧방울을 재건한 수술이 흔히 볼 수 없기에 기억에 많이 남았다.

 

어느덧 마지막 수술날이 되었고, 가장 걱정되는 1세 미만 환아의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전날 양측성 완전구순열수술을 위하여 전신마취를 시도하였는데 기관지경련증상이 보여 수술이 취소되었던 환자이기 때문에 모두가 초긴장상태였다. 다시 마취를 시도하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이때의 영아들은 빠르게 커서 지금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의료진 모두가 알고 있기에 쉽사리 수술을 포기해 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오용석 교수님께서 노련한 기술로 기관지확장제와 스테로이드를 이용하여 이번에는 큰 이벤트 없이 마취에 성공하였고, 최진영 교수님께서 빠르고 완벽하게 수술을 마무리해주셨다. 모든 의료진들이 숨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무사히 아기가 깨어났고, 다들 박수를 치며 진심으로 안도하였다. 어른의 엄지손가락을 완전히 감싸쥐지도 못할 만큼 아주 작은 손을 꼬물거리는 것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처음 도착해서는 시간이 참 안 간다고 느껴지겠지만, 일단 첫 수술이 시작되면 그 뒤로는 쏜살같이 흘러가.” 수년 전 일웅 베트남 의료봉사에 참여했던 우리 병원 수간호사님의 조언인데, 정말이었다. 수술과 마지막 외래가 끝난 후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이미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고, 빠르게 한국의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 며칠은 토끼굴에 빠졌던 앨리스처럼 꿈을 꾸듯이 지냈던 것 같다. 하지만 바쁜 일과에 시달리다 보니 나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베트남에서의 기억은 점점 흐려져 버렸다.

 

그러던 중 반가운 소식이 왔다. 수술했던 환자 중 4명이 최근 사진을 보내온 것이다. 갈라져 열려 있던 입술은 모두 닫혔고, 무엇보다도 아이들 표정이 수술 전과는 다르게 아주 밝았다. 이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아이들인지 미처 몰랐었다. 그 수줍고 천사 같은 미소를 보고 있자니, 한 달 전에 내가 무심히 마음 속 상자에 넣어 버렸던 베트남에서의 추억과 감정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오는 걸 느꼈다.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일웅재단의 큰 뜻을 이어가고 있는 교수님들, 오랫동안 우리 의료봉사회와 깊은 우정을 나누고 고마움을 잊지 않는 베트남 관계자들, 일 년간 쓸 수 있는 휴가를 모두 반납하며 의료봉사에 참여한 간호사 선생님들, 그리고 단 하루의 수술을 보기 위하여 두바이에서부터 날아온 이혜미 간호사님까지… 내가 본 것은 일상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선하고 순수한 열정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베트남에서의 열흘이 올해 가장 가슴 뛰고 뜨거운 겨울이었다는 것을. 참, 생각난 김에 코로나로 판단력이 흐려진 나에게 베트남에 가겠느냐고 불쑥 전화했던 동료에게 커피와 밥을 사야겠다. 고맙다 친구야!

 

이승민 서울대치과병원 구강악안면외과 임상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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