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대부분 반복된 일상을 거듭하며 살아간다. 하루를 새로이 맞고 또 하루를 마감한다. 누구나 일관된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지루함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때로는 신선한 변화가 필요하다. 무더운 여름에 한줄기 시원한 바람처럼, 갈증을 느끼는 메마른 생활 속에서 시원한 생명수 한잔처럼, 우리의 삶에 탄력을 주는 청량제가 필요하다. 지루한 삶의 연속은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우리들의 영혼이 갈증을 느끼게 되고 그것은 바로 스트레스가 되어 우리들의 건강을 해치며 혼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나는 수시로 변화를 갖고 살려고 노력한다. 재미있는, 그래서 행복한 삶은 얼마든지 있다. 등산, 낚시, 그림, 음악, 술, 여인… 그 중에서도 제일 우리를 즐겁게 하고 가슴에 기운이 쌓이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주말에 좀 쉬겠다고 해서 집에서 종일 TV나 보며 뭉개면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무엇인가 잃어버린 듯 허전함을 금할 수 없다. 피로가 더 쌓이는 듯하다. 나만 그런 것일까?
서울에서 한 시간쯤 달려가면 바다가 보이는 곳이 있다. 서해안 영종도다. 을왕리 낙조대에서 바라보는 일몰의 장관, 장봉도, 신도에서 보는 광활한 바다, 그리고 갯내음, 이런 것들을 구경하고 나면 그 다음 일주일이 새롭고 산뜻하다. 가슴에 천지기운이 쌓인다. 일할 맛이 난다. 그래서 나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차를 몰고 나선다.
여행은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일상에 찌들려 삭막해진 우리들 가슴에 신선한 에너지를 준다. 가는 곳마다, 부딪히는 곳마다 장면이 다르고 그림이 다르다. 대자연은 우리들의 위대한 스승이요, 우리를 치료하는 의사란 말이 없다.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서 웅장한 모습으로 속세에서 꼬무락거리는 우리 인간에게 변함없는 한결성, 일관성을 깨우쳐주고 또 천지 기운을 우리 가슴에 담아 웬만한 병은 여행 그 하나로 치료가 된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떠난다. 무심코 가다가 도로변 커피머신에서 커피 두 잔 뽑아가지고 마누라와 나란히 벤치에 앉는다.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본다.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어 가로수 주변에 흩어진 낙엽을 날린다.
“여보, 우리가 꽤나 오래 살았나 보다. 조만간 우리도 저 낙엽 신세가 되겠지.”
꽤나 먼길을 와 버린 느낌이다. 버스에 오르고 내리는 사람을 본다. 여러 사람이 내리는데 별로 잘생긴 사람은 없다. 천차만별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삶을 갖고 열심히 산다. 종이컵에 따른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 부부는 세상 모퉁이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지금도 그 순간이 추억이 되어 그 순간이 내 머리에 남아 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떠나는 이유는 다가올 여러 가지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설렘을 갖고자 함이다. 붓글씨를 쓸 때 좋은 작품을 만들 작정을 하고 글을 쓰면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마음을 비우고 글을 쓸 때 갑자기 튀는 작품이 나올 수 있다. 무엇이든 의도가 들어가면 잘 안 된다. 골프를 칠 때 잘 치려고 작정을 하면 힘이 들어가서 잘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느 해 연말 예약 없이 삼척에 갔다. 잘 곳이 없었다. 민박도 없다. 당황한 나는 물론 객실이 없을 줄 알았지만 삼척 관광호텔을 찾았다. 특실이 하나 있다. 엄청나게 비싸다. 욘사마 배용준이가 묵으면서 촬영했던 방이란다. 방안에 핀란드 사우나까지 있는 방이다. 거지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말이 있다. 옜다 모르겠다. 저질렀다. 정월 초하루 새벽. 거기서 바라보는 일출! 너무 아름다웠다. 방안으로 붉은 햇살이 몽땅 들어왔다. 그해 일 년 기운이 넘쳐흘렀다. 계획 없이 떠난 여행이 잊을 수 없는 해프닝으로 아직도 추억이 되어 남아 있다.
지난 여름 휴가 때 동해안 허리를 돌았다. 꿈같이 아름다웠던, 너무 좋았던 여행이었다. 경주 밑 감포에서 시작하여 동해까지 올라갔다. 고속도로 대신 국도를 이용해 항구마다 다 들렀다. 나는 원래 그냥 가던 길을 가다가 모르는 샛길이 있으면 일부러 무슨 길인가 하고 들어가 보는 성미가 있다. 그래서 특별히 멋있는 구경거리를 친구들에게 소개하면 언제 그런 데를 귀꿈스럽게 가봤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바다가 바로 평화다. 바라보기만 해도 한가롭고 이 세상 일만 근심이 사라진다. 화가들 그림의 소재로 항구가 많이 등장한다. 출렁이는 파도, 수평선 저쪽까지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 보석처럼 빛나는 섬들, 어선들이 즐비하게 정박해 있고, 바쁘게 움직이는 군상들… 한편의 그림이다.
동해안 국도를 따라서 삼척 쪽으로 올라가면서 항구마다 다 들렀다. 항구에 들어서면 우선 갯 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살아 움직이는 활어들. 눈으로 보는 것이 먹는 것보다 더 좋다. 항구마다 다 비슷할 텐데 뭐 하러 항구마다 들르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항구마다 맛이 다르다. 그 구도가 다르다. 방파제가 다르고, 선박들의 움직임이 다르고 사람들의 모습이 다르다.
우리는 여행을 하면 먼저 숙박지를 예약한다. 나는 그러지 않는다. 날 저무는 그 시간에 현장에서 정하면 된다. 절벽 아래 벼랑에 걸려 있는 민박집에서 하룻저녁 머문다. 그 집 마당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절경이다. 정말 멋있다. 정해진 호텔에서 하루저녁을 묵은들 그게 무슨 추억이 되겠는가? 사는 동안 줄곧 마음속에 머물면서 우리의 영혼을 즐겁게 해주는 추억은 모두가 감동적인 순간순간들이다. 그래서 나는 목적지 없는 여행을 즐긴다.
오늘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내일 우리가 여행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여행을 통해서 천지기운을 마시면 내일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유태영
유태영치과의원 원장